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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추천스토리

인생락서 가족여러분!   오늘 밤, 오랜만에 재미있는 경기가 있는 날이죠? 바로 국가대표 축구 아시안컵,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 중국과의 경기가 펼쳐진답니다~   여러 매체에서 대한민국의 승리를 점치고 있지만, 혹시? 설마? 하는 분들도 있는 거 같아요.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로, 스코어 맞히기 이벤트 한 번 해볼까요?   □ 행사내용 아시안컵 한국과 중국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의 예상 스코어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추첨을 통해 경품 증정   □ 경품 한국의 진짜 매운 맛을 보여주마! GS25 삼양 불닭볶음면(용기) 교환권 (그럴리 없겠지만) 한국 무승부 또는 패배 시 100분께 증정 한국 승리 시 300분께 증정   □ 행사기간: 1.16(수)~1.17(목) □ 당첨자발표: 1.21(월) □ 경품발송: 당첨자 발표 후 인생락서에 등록된 전화번호로 발송   <유의사항> ※ 경품 발송을 위해 위탁 업체인 ㈜인터파크비즈마켓에 회원님의 휴대전화번호가 제공되며, 이용 후 즉시 폐기됩니다. ※ 개인정보 입력오류 및 스팸 등록 등으로 인한 발송 오류 시 재발송해 드리지 않습니다. 등록된 프로필의 전화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세요. ※ 본 게시물은 인생락서 첫화면 하단의 #알려드려요 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시안컵 중국전 예상 스코어를 댓글로 알려주시면 추첨을 통해 불닭볶음면 증정!   오늘 밤 10시 30분부터 JTBC를 통해 생중계된다고 합니다! 다 같이 대한민국 파이팅!~~~ 팬응모를 통해 선정된 이번 경기 공식 응원문구라고 하네요! 인생락서관리자
백세시대 운운하며 60-70대의 나이는 중년이라고 부추기는 세태이지만, 눈만 뜨면 보이고 들리는 것이 상업 광고 일색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를 권장하는 프로퍼겐더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정년퇴직 이후 나름의 외출 기준을 정하였다. “애써 집 밖을 나설려고 하지 말되, 불러주는 자리만큼은 마다하지 말자” 이렇한 원칙을 정한 이유는 해가 더할수록 스스로 살펴 보아도 미워져 가는 모습, 남에게 비쳐지는 것도 싫고 또한 흔쾌히 돈을 써가며 나다닐 충분한 노후 생활을 준비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박완서 선생님은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난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 꼴 충분히 봤다. 한 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어떤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나도 이제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그리 오래 살고 싶지도 않으니 여기에서 은퇴한 자의 자유로움이 시작 되는것 아니겠는가? 다행히 일찍이 서울 탈출을 감행하여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곳에 집 한 칸 마련하였다. 해질 무렵이면 집사람과 함께 강변 산책을 즐길 수 있고, 서가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다가 답답하면 뜰에 나와 수목이나 화초를 살펴보며 강너머 시선에 잡히는 첩첩의 능선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칩거에 치중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천국의 삶이고, 집 밖으로 나가면 세속적 삶이다” 라고 하는 이란의 속담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국내외를 막론하고 전철이나 버스에서, 또는 공공장소 에서 스쳐 지나가는 대부분의 노인들 모습, 고약하고 밉살스럽게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노부부가 손잡고 거니는 모습, 자기가 살던 동네 공원이나 카페에서 친구들과 담소하는 모습, 어린 손주 손 잡고 등하교 시켜주는 모습 정도가 내가 마주칠 수 있었던 노년의 아름다움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름답고, 품위있게 늙어가려는 노력, 지난한 과제임은 분명하다. 진정, Well Aging을 위하여 고민해 보아야 할 때인 것이다. "칩거를 원칙으로 하는 자"에게 많은 위로가 되는 의미심장(?)한 벨기에 속담이 떠오른다. "행복해지려면 숨어 있어라". 이에 더하여 스스로 만든 말, 動卽錢, 움직이면 돈이다. 기꺼이 지갑을 열 생각이 없으면서, 나다니는 것 금물이다. 허당거사
조문객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탓에 정신 없었다. 한 손에는 육개장을 한손에는 사이다를 들고 분주히 움직였다. 난 이제 ‘다 컸으니’ 도울 수 있다. 그런 나이니까. 직접 장례를 돕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우리 할머니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테이블 밑에서 쪽잠을 자도 괜찮았다. 엄마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울림이었지만 “할머니 돌아 가셨어. 그러니까 간단히 준비하고, 아빠 차 타고 언니랑 오면 돼.” 엄마의 목소리는 하나도 떨리지 않고, 침착했다. 날 그리도 이뻐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처음엔 어벙벙한 마음이 들다가 전화를 끊 자 눈물이 났다. 처음엔 허리의 통증이었다. 증세는 점점 악화되었고, 할머니를 요양 병원에 모셨다. 엄마도 이모네도 삼촌네도 매주 가면서 물을 주는데도 할머니는 나무처럼 버석버석 말라갔다. 눈물이 멈추고, 지끈한 슬픔이 가시고 나니 자동차 밖 풍경이 좀 보였다. 온통 회색 아스팔트, 장례식장으로 열심히 내달리고 있었다. 엄마 어쩌지… 가서 엄마를 보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를 위로할 수 있을까. “엄마...” “어, 그래 왔어. 짐은 저기다 두고, 옷 갈아입고 와.” 엄마.하고 부른 다음에 무슨 말을 떼기도 전 엄마가 말했다. 할머니의 죽음도 죽음이었지만 난 자꾸만 엄마가 신경 쓰였다. 그에 비해 엄마는 매우 담담하고 차분했다. 할머니와 요양 병원, 그리고 매주 가서 할머니를 돌보았던 엄마, 어느정도 예고 되어있던 죽음이라 그런 것일까. 역시 맏이라 그 어른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일까.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 엄마라서 그런 것일까. 내가 수업이다 뭐다 하며 할머니에게 자주 가지 않아도 우리 엄마는 별 말 없었다. 매주 병원에 다녀와서 할머니의 소식을 전해주며 전화 말미에는 언제나 우리 딸은 잘 될거니까 믿는다, 할 일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 했다. 우리 엄마는 그랬다. 뭐든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밥 먹기 싫다 하면 먹지 않아도 되었고, 그 흔한 공부 좀 해라 잔소리도 없었다. 맏이라 참고, 맏이라 포기하고… 장녀로서 강요받아 온 것들이 많아서 당신 딸들에게는 그런 것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엄마는 내가 가는 방향을 지지해주었다. 대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네가 지라고 했다. 나를 너무나 옥죄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방관해버리는 것도 아닌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이야기를 하다 가끔 ‘딱 네 나이 때 말이지’하며 황홀함에 젖어 들었다. 집안을 위해 일찍 사회생활에 뛰어든 우리 엄마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월급 받아서 밑에 동생들 다 가르치고, 집안을 착실히 먹여 살렸다. 투피스 정장에 구두는 늘 7cm, 엄마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시절 엄마의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 엄마가 아빠를 만나고 나서 꿈꾸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아이가 생겼다. 사업이 잘되어 사모 소리 들으며 꿈 같은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으나 아이엠에프의 칼바람을 맞고 완전히 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엔 늘 악착같이 일어나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우리 때문에 버텼다고 한다. 내세울 게 없을 만큼 어려운 시기에도 엄마는 친척들 앞에서 너스레 떨며 딸들을 자랑했다. 우리는 엄마의 자랑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런 엄마를 보고서 언니와 나는 말썽을 부릴 수 없었다. 아름답고, 유쾌하고, 솔직하고, 때론 우리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해하고, 절대 넘어지지 않는 우리 엄마를 보고 난 자랐다. 할머니의 관이 입상리에 들어섰다. 그 뒤에 가족들과 동네사람들 그리고 엄마가 뒤따랐다. 관이 할머니네 집 근처에서 빙빙 돌더니 멈추어 섰다. 그러자 엄마는 “엄마…!” 하고 내지르면서 무너졌다. 삼촌과 이모도 그 모습을 보고는 뒤따라 관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남들이 보기에 정말 가슴 절절한 풍경이었다. 나는 충격적이었다. 엄마도 저렇게 무너질 수 있는 거구나. 엄마도 저렇게 엉엉 울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 엄마도 딸이지, 엄마도 엄마가 죽은 거니까. 그 찢어지는 마음을 내가 10분의 1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엄마는 그렇게 엄마의 엄마를 보냈다. '엄마'라는 단어는 희한하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 같고, 미안해서 울음이 잔뜩 고여버리는 단어다. 난 우리 엄마가 너무 좋다. 그치만 엄마라는 존재가 감당할 수 없이 너무 커서 내가 그 만큼 할 자신이 없다. 참주
어린날의 자전거                                                          유 재 용  6박 7일이라는 포상휴가 첫 날. 그 황금 같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한 결과 친구들과 오랜만의 회포를 푸는 게 가장 뿌듯하리라 생각했다. 집 근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나가려던 나를 어머니께서 만류하셨다. ‘어두우니 사고가 날 것 같다.’는 매번 똑같은 어머니의 걱정 어린 말씀. 그러나 친구들과 만나 마실 맥주 생각에 어머니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다.약속장소는 집에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올림픽공원. 갑자기 비가와도 끄떡없는 공원 앞 자전거주차장에 자전거를 안전하게 묶어놓고 친구들을 만날 계획이었다. 해가 져 꽤 어두컴컴한 밤이었기에,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았다. 밤이라고 해도 여름은 여름, 한낮의 햇살을 받은 지면은 더웠고 팔을 스치는 공기는 꽤나 습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 시간을 즐기는 입장에서 밤공기는 한없이 산뜻한 피서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만에 달리는 페달도 내 마음만큼이나 가벼웠다. 옆 도로의 자동차들마저 모두 어딘가로 놀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소음이라고 여길 자동차 소리도 페달 위에서 달리는 지금의 나에게는 그저 즐거운 비명으로 들렸다. 맥주 첫잔이 휴가 첫날처럼 짜릿하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한참 후 그럼 다음 휴가를 기약하자는 마지막 잔을 아쉽게 내려놓고 온 사이, 자전거는 나를 떠났다. 언제나 당연하게 나를 기다려주던 자전거는 거짓말이라도 하듯 사라졌다. 어머니께 전화로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터벅터벅 집까지 걸어갈 때,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누군가 묶어놓은 자전거를 절단하여 가져간 것일까, 아니면 이제까지 그를 지켜주던 자물쇠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까. 지난 시간동안 변할 만큼 변한 나와 그 녀석은 흘러간 시간만큼 연(緣)이 어긋나 이제 더 페달을 밟을 수 없게 된 걸까. ‘함께 공원에 참 많이 왔었는데, 이제는 같이 올 수 없겠지.’하는 생각은 가뜩이나 취기가 돌아 무거워진 발걸음을 붙잡았다.처음 그 자전거를 만난 건 15년 전, 한창 어린이용 두발자전거에 달았던 빨간 보조바퀴 두 개를 제거하고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심정으로 쉴 새 없이 넘어지던 때였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겨우 중심을 맞춰가며 방향전환이 가능하게 될 무렵, 아버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21단 기어변속 자전거를 선물해주셨다.그 당시 자전거는 나와 함께 하기엔 너무 컸다. 조절 가능한 안장 높이를 최대한 낮췄으나 두 다리를 쭉 뻗어도 지면에 닿을 수 없어 굉장히 불안했다. 멈춰 서 있을 때 한쪽 다리로 위태롭게 자전거의 무거운 몸통을 지탱해야 했지만, 커진 바퀴 덕에 훨씬 높고 넓은 시야에서 운전할 수 있었고, 그 덕에 흡사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곤 했다. 그와 함께 나의 ‘운전’ 기량은 차차 향상되었고, 그는 나를 더 넓은 곳으로 인도해주었다. 21단 기어변속으로 평소에는 오를 엄두도 못 내던 가파른 오르막길도 문제없었다. 시작은 아파트 앞 놀이터였지만 자전거는 올림픽공원, 한강 등 가보지 못한 여러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2년간 우리는 단짝 친구가 되어 여기 저기 쏘다녔다.그렇게 한창 어린 날의 추억을 만들던 때에, 갑작스런 이별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아버지의 회사 발령으로 온 가족이 인도네시아라는 생소한 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 어렸던 나에게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로 향하는 것은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컸다. 자전거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살게 될 집 주변부터 서서히 새로운 곳을 탐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치안이 좋지 않은 인도네시아에서 자전거 탈일은 없을 거라며 그를 한국에 놓고 가야 한다고 하셨다.여름 방학 동안 잠시 한국에 올 때면 제일 먼저 자전거가 잘 있나 확인했다. 용케도 자전거는 먼지를 푹 뒤집어쓴 채 아파트 복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는 뿌연 먼지로 덮여졌고, 바퀴 바람은 다 빠져버렸지만 쓱싹쓱싹 마른 걸레로 닦아내고 공기 펌프로 타이어에 공기를 채워 넣으면 마치 새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자전거는 쌩쌩 잘도 달렸다. 테니스를 치러 갈 때, 수학 학원에 갈 때, 영화관에 갈 때, 나는 대중교통 대신 자전거를 택했다. 나에게 커서 버거웠던 자전거는 어느새 내 몸에 딱 맞았고, 나의 이동수단 첫째는 늘 자전거였다.그 후 미국으로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한동안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국제학교에서 여러 시험들을 치러야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알아주는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 통지서를 받고 나서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큰 여행가방 두 개를 양손으로 낑낑대며 한국으로 돌아온 나를 처음으로 맞이한 건 바로 복도에 그대로 서 있던 자전거였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쭉 그 자리에 있었기에 더 이상 대수롭지 않았다. 마치 베란다 밖 풍경을 보듯, 언제 봐도 새로울 것 없는 기억 속의 배경이 된 것이다. 이제는 그 녀석과 함께 달릴 수 있었다. 자전거는 먼지가 쌓이고 고무바퀴가 갈라져 바람이 잘 세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 시간은 비껴가지 않았다. 사탕을 입에 물고 학원에 가던 조그마한 나는, 이제 비싼 미국대학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해 영어 꽤나 하는 해외파 과외선생님이 되어 이곳저곳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어느새 키는 훌쩍 커 버려 자전거 안장을 아무리 높여도 자전거가 작게 느껴지게 되었다. 무리한 기어변속으로 낡은 자전거의 체인이 빠질 때마다 손수 기름때로 얼룩진 체인을 다시 기어에 끼워 맞추는 일도 귀찮아지고, 친구들이 더 크고 세련된 자전거로 바꿀 때마다 나도 새 자전거를 구입할까도 생각하게 되었다. 군 입대 전 부모님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자전거를 사촌동생에게 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지만, 그래도 그와 든 정 때문인지 차마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휴가 나왔을 때, 이제 어른이 되어 변해버렸지만 여전히 사탕을 물고 있을 것 같은 친구들과 그 자전거는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은연중에 스쳤다.자전거를 잃어버린 후 휴가 복귀 날까지 매일 그곳에 가서 혹시라도 돌아왔을까 확인하였지만, 사라진 자전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공원 근처에서 하염없이 자전거를 찾다가 문득, 그 녀석과 비슷한 생김새의 자전거를 타고 있는 꼬마를 보았다. 예전의 나처럼 안경을 끼고 비틀거리며 뒤에 계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가며 자전거를 타던 그 꼬마는 어린 시절의 나와 영화처럼 포개어졌다. ‘이제, 놓아 줄 때인가?’ 어른이 다 된 나를 먼지만 쌓여가며 기다리기보다, 함께 눈을 맞추며 내가 기억하는 올림픽 공원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 15년 전 나와 비슷한 친구를 만나는 일이 어쩌면 운명이었을까.그 꼬마를 보며 마음속으로 손을 흔들었다. 15년 전의 시간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올림픽 공원을 달리던 나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자전거를 타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자전거 없이 걸어야 할 때가 됐다. 다만 언젠가 태어날 내 아들이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하거든, 그 자전거를 힘껏 밀어 주리라. JYYOO
지난 11월6일은 아들의 22번째 생일이었습니다.육군으로 만기제대와 현재 대학교 2학년(졸업반)에 다니면서, 조기취업하여 직장을 다니고있다.성인으로서,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아들에게 줄 선물을 많이 고민하다가 카톡으로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는글을 올렸습니다.-카톡으로 보낸 아들의 생일 축하 메세지입니다. 22년전, 오늘 12시30분 보규가 태어난 곳이다.물론 병원에서 태어 났지만, 주소는 이집 주소가 너의 출생지란다. 3살때... 집앞 다리에서 7살때... 송추집에서 8살때... 안동화회마을에서 9살때... 동생 보운이와 강화 동막해수욕장에서 10살때... 할아버지가 계시는 경주 석굴암입구에서 11살때... 장흥유원지 주막촌에서 12살때... 경주 할아버지댁에 가던길에 경북 군위휴게소에서 13살때... 충북단양역 앞에서 14살때... 목암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15살때... 광화문 이순신동상앞에서 동생 보운이와 16살때... 지리산 노고단에서 17살때... 수원 외삼춘 딸 결혼식장에서 18살때... 장흥 피자성효인방에서 동생 보운이와 19살때... 파주헤이리마을에서 20살때... 철원 노동당사 앞에서 21살때... 군입대후 첫휴가 복귀중에 동두천 소요산 입구에서 22살때... 마지막 군면회장에서... 23살때... 집앞 카페에서-이렇게 시간이 흘러 갔구나!보규야 생일 축하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해 주어서 고맙다.아빠는 많이 못해준 미안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구나.사랑하한다. 자랑스러운 내아들 최보규.-아들의 답 입니다.-"충분히 잘 해주셨습니다.감사합니다." 최영철호인
"넌 나를 욕하겠지만, 난 진심으로 너네 아빠를 사랑해서 결혼한거야."그녀는 감히 내 앞에서 '사랑' 이라는 단어를 들먹였다. '당신 때문에 내 부모님이 이혼한거잖아!'속으로 여러번 외쳤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왜냐면 난 어른에게 예의 바르고 착한 아이니까. 이제 막 중1이 된 나는 새로운 중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은 신기하다. 아무리 커 보이는 문제가 있어도 더 큰 문제가 닥치면 그 더 큰 문제를 해결하느라 앞서 있던 문제는 더 이상 큰 문제로 보이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 당시 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중학생이 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했으나, 더 큰 새로운 환경에 놓여져 버리니 중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들이랑 인사나눴어? 너네 반 친구들은 어때?""그냥 그래. 괜찮아.""그래? 우리 반에는 어떤 애들이 있냐면..."절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 이제 우리 중학생이야. 어떡하지? 공부도 더 어려워질텐데. 그런데 무슨 일 있어?""응? 아니. 아, 뭐.""무슨 일인데?""그냥. 새 거야. 새 집이 생겼어. 큰 내 방이 생겼어. 새 책장, 새 책상, 새 침대... 그리고 엄마도.""엄마? 새 엄마야?"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줄 알았다. 전교생 앞에서 전국 글짓기대회며 그림그리기대회에서 수상한 상장을 다시금 수여 받으며 소위 '나 잘나가' 티를 내기도 하고 공부는 늘 잘했고 반장을 맡은데다 인기가 늘 많아 내가 인생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아, 주인공은 맞았다. 그러나 비련의 주인공이 될거라 생각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부모님이 날 부르시곤 담담하게 이야기 하셨다. "많이 놀랄 거라 생각하지만, 엄마, 아빠는 성격 차이로 이제 각자의 길을 가려고 한다. 넌 똑똑하니까 엄마, 아빠를 잘 이해해 줄거라 생각한다."처음 알았다. 아, 부모님이 헤어지실 수도 있는 거구나.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할 수 없었다.'헤어지지 마세요! 제발!'왜? 난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올바른 착한 딸이니까. 그 쯤부터 였을까. 편두통이 극심하게 찾아왔다. 오른쪽 이마, 오른쪽 눈가, 오른쪽 뺨, 오른쪽 치아, 오른쪽 턱까지 내려오는 극심한 고통. 한의원에도 가보고 CT, MRI를 모두 찍어보았으나 이상이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저거 아프지도 않은데 꾀병 부리는거라니까! 내가 새엄마라고 시위하는거잖아.""애 듣겠다. 조용히 해!""병원비가 얼마야. 아휴."아빠와 그 여자의 대화를 들으며 처음으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했다. P.S : 연재를 계획하고 있으며, 제 이야기는 처음으로 써 보네요. ^^ 빨강머리 앤에 착안하여 제목은 그렇게 잡았습니다. 빨강머리 앤 처럼 늘 긍정을 품에 안고 있답니다. 드라마를 보면 시시할 정도로 제 인생이 꽤나 드라마틱하답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억수로
아찔함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다. 가수 이적은 이걸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음의 끄트머리에서 음을 가늘게 튕겨 올리는 그의 기교가 그것을 드러낸다. 진성과 가성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그 소리는, 섹시하다. 삑사리와 삑사리 아닌 것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이 묘한 음 처리 방식은 부정의 여지없이 매력적이다. 정해진 선을 벗어난 음의 일탈이라고 하면 좋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일탈이 그러하듯이 아무래도 교과서에 나올 것은 못 된다. 따라하면 목 나가니까. 따라해 봐서 안다.초등학교 2학년 1학기 즐거운 생활 수업에서 '맨손으로 빌딩 등반하기'를 즐길거리랍시고 소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교과서에 실릴 수 없는 그곳엔 아찔함이 있고, 아찔함에는 사람을 끄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적의 그 줄타기는 유독 사랑스럽다. 의도적 삑사리라니. 게다가 아무도 따라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반항아적이고, 어긋나 있고, 매력적인가. 이러니 나는 이적이라는 가수에게 빠질 수밖에 없다.‘개드립.’ 내 지인들에게 나를 설명해 달라 부탁하면 아마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이 단어를 사용할 것이 분명하다. 부정할 생각도 여지도 없다. 의도였든 아니든 간에 말장난은 내게 있어 일종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렸다. ‘위로가 필요한 당신, 엘리베이터를 타세요.’ 이 따위의 헛소리들을 틈이 날 때마다 주워섬기는지라. 개드립도 재판정에 서야 할 사유가 된다면 아마 나는 순순히 내 죄를 시인해야 할 테다.내 말장난 뒤에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참신한 노잼이라는 비교적 호의적인 평에서부터, 아재(이건 비교적 귀여운 편이다.)나 한국어 낭비, 아무 말 대잔치처럼 명백히 적의를 담은 이야기까지. 어쨌든 호감은 차치하고, 다들 별로 재미없어 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만 아무리 짜증나는 성질의 것이라도 극에 다다르면 인기가 생기긴 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 재미없는 말장난으로 대학교 대나무숲 베스트 댓글란에 꽤 자주 이름을 올린다. 한 번은 어느 인터넷 신문 기자가 그걸 따다가 뉴스에 올리기까지 했으니, 이쯤 되면 도가 텄다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너무 긍정적인 단어 선택인가 싶기도 하지만, 왜, 도둑질에도 똑같은 표현을 쓰는 판에 개드립이라고 해서 못할 건 없지 않나.물론 이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정도의 범행을 저지르려면 범행동기 정도는 있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재미없는 걸 듣고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재미있어서.’는 당연히 아니다. 하긴, 그런 걸 보고 즐거워하는 악취미가 없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건 제일가는 사유가 되기에는 박력이 좀 부족하다. 그보다는, ‘내가 세상을 보려는 각도의 문제’가 좀 더 박력 있는 주인공의 위치에 적당하지 않을까.'핀트의 묘한 어긋남'이라고 하면 좋을까. 정석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상태로 세상만사를 보면 어디엔가 묘한 틈새가 보인다. 그 틈새에는, 짜릿함이 있다. 마치 이적의 삑사리 줄타기 같은. 그것이 내가 그 사이를 파고들어가는 이유이다. 많이도 안 되는, 약간이어야만 하는 그 약간의 비틀림. 시선의 일탈. 그것이 가지는 그 묘한 마력을 나는 언제나 거부하지 못한다.말장난을 할 때 우리는 그 단어의 표면에 집중하지 않는다. 약간 비스듬하게 눈을 째뜨고 그 단어의 스펙트럼을 본다. 정면 돌파가 아니라 측면 공략이다. 그래야 틈새가 보인다. 그 틈새를 잡고 쪼개어 그 말이 가지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안 그래도 못생긴 내 얼굴이 부으니까 신문의 부음 기사에 올라올 수준이 되어 버렸지 뭐야.’ 따위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도록. 그것이 내가 주목하는 비틀림이다.그나마 글다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나는 저 비틀림에 집중해 왔다. 어떤 잘 배운 듯한 양반들은 내 글을 읽고서 글에서 키치가 보이네 뭐네 하기도 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그냥 저 삑사리가 좋다.나는 천부적으로 소심한 반항아였다. 악센트는 소심함 쪽에 두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반항심을 표출하고 싶었으나 소심함 탓에 스스로를 좌절시킨 나의 최종적 선택지가 바로 저 삐딱선이었으니까. 주어진 것을 괴상하게 해석하는 것이 내가 반항심을 표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느 케이블 TV 회사에서 주최한 백일장에 참가한 적이 있다. 고등학생 때였다. 그 회사는 한창 디지털 방송 서비스를 런칭하고 있었다. 축복이라도 받고 싶었는지 그 양반들이 내건 글 주제는 ‘디지털 세상’이었다. 교과서 글쓰기 테마로 나오면 딱 적당할 종류였다. 끔찍하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디지털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아날로그적 가치들에 대한 회상’을 주제로 글을 적어 내려갔다. 결국 ‘나는 디지털이 싫다’라는 말과 함께 글을 마쳤고,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게 미친놈이라고 욕을 했다. 나는 그 백일장에서 수필 부문 2위를 기록했다. 아마 삐딱선 중독의 단계까지 다다른 것이 그쯤부터였을 거다.중독이란 단어를 썼다. 그래. 확실히 중독이었다. 어쩌면 반항아의 뉘우침일지도 모르겠지만.나는 확실히 이 비틀림을 사랑한다. 헌데, 이 욕망을, 이 비틀림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요즘 들곤 한다. 내가 좋아해서 이걸 하는 건지, 아니면 이 각도가 아니고서는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건지. 확실치가 못한 것이다. 아무 데서나 아무 때에나 삐딱선을 타 버리면 좀 곤란하지 않은가.밴드를 했었다. 보컬이었다. 잦은 삑사리로 리더의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나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삑사리를 냈다. 고음에서도 냈고 저음에서도 냈다.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망치고를 둘 다 혼자 해냈다. 보컬인데 북도 치고 장구도 치고 혼자 다 해냈다. 참 착하기도 한 우리 밴드 멤버들은 내가 삑사리를 낼 때마다 내가 민망하지 않게 한껏 유쾌하게 웃어줬고, 나름대로 우습고 귀여운 별명까지 붙여 주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이것이 밴드 보컬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임은 명백했다. 우리 멤버들이야 웃으면 웃는 거라지만, 관객들도 웃어버리면 그건 좀 곤란하니까. 이 문제도 해결할 겸 노래 실력도 향상시킬 겸 보컬 학원에 등록했다.트레이너는 정말 생각도 못한 진단을 내놓았다. ‘습관적’인 삑사리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압력이 가해지면 내 목이 습관적으로 삑사리를 내버린단다. 사실이라면 그것 참 끔찍한 습관이었다.이적의 창법이 너무 좋았다. 중학생 때, 지금처럼 노래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부터 나는 이적을 모창했다. 그 매력적인 삑사리까지. 이적을 따라하고 따라하고 또 따라했다. 그러다 보니 목이 그것의 모양대로 굳어 버린 모양이었다. 내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되어 버린 모양새인 모양이었다.어쩌다 말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상황이 늘 비슷하게 흘러간다. 다들 그렇듯 와글거리며 사나운 말을 주고받다가, 상대가 나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내 말의 요점이 지금 그게 아니잖아. 그 소리를 들으면 조금 멍해진다. 밀리기 시작한다. 벌어진 틈새를 보다 보니 핵심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측면을 보다 보니 앞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핵심과 앞모습을 보아야만 할 순간에서조차도. 그래. 대화에서 삑사리가 나 버린 것이다. 매력적인, 섹시한 그거 말고, 무대를 망쳐 버리는. 음의 일탈이 아니라 음의 이탈. 이를 마주하는 순간의 관객이 일반적으로 웃음이 아니라 분노로 화답한다는 점은 보통의 삑사리보다도 더 끔찍했다. 가끔 더럭 겁이 난다. 이 비뚤어진 시야를 계속 안고 가다가 어느 순간에는 보통의 대화마저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음 하나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목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물론 나는 나의 시선이 좋다. 이 묘하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약간’ 틀어진 이 각도가 좋다. 내가 이적의 그 창법을 여전히 좋아함과 마찬가지로.어떤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어조는 옛날 괴기 동화풍의 것이 어울릴 것 같다. 둘이 너무 좋아해서 항상 손을 꼭 붙잡고 다니던 자매가 있었는데 어느 날 손이 서로 붙어버려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게 되었다더라, 뭐 그런. 이 자매는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노력을 좀 해야 할 것이다. 손이 서로 붙은 상황에서 싸우기라도 하면 그거 참 답 안 나오는 상황일 테니. 그 이후에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을 배워야겠지. 어차피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할 거라면.내게 요구되는 답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 시선을 계속 사랑하고, 이 스타일을 어떻게 하면 멋지게 써먹을 수 있을까 궁리해야겠지. 평생 붙어있을 거라면, 쓸모 있는 게 붙은 쪽이 나으니까.요즘은 이적의 스타일을 제법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 노래를 해야할 땐 모창을 그만두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의 매력적인 삑사리가 내 창법 구축에 큰 몫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그에 익숙해지고, 컨트롤 능력이 나아졌고, 결국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아직 어렵긴 하지만 어쨌든 목에 가해지는 압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무기 중 하나가 되었다. 정석과 내멋대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삐딱한 시선이 그렇듯이.일탈을 시도하다 실수로 한 발짝 더 뻗어 이탈을 해버려도 별 수 없다. 삐끗함에 멈출 발걸음이었다면 진작 멈추었을 테다. 나는 아마 계속 숨 쉬는 듯한 말장난을 할 것이고, 틈새가 보이면 비집고 쪼개보려 들 것이다. 앞에 뭔가 보이면 옆모습을 보려 하겠지. 내가 살아온, 사랑한 방식대로. 내가 살아갈, 사랑할 것이 틀림없는 방식대로.왜냐면, 그게 섹시하니까. 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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