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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추천스토리

알람 기능이 있는 탁상시계는 이제 시대의 遺物이 되지 않았나 싶다. 장롱 속의 카메라도 그렇고 한때 즐겨 들었던 오디오도 마찬가지 신세이다. 모델이 단종되었으니 수리 부품을 확보할 수 없고, 카메라의 경우에는 더욱 편리한 기능의 디카로 하루아침에 자리 바뀜이 되어 버렸다. 30여 년 정든 탁상시계를 들고 수리할 곳을 찾아 여기 저기 쫓아 다녀봤으나 헛걸음만 치고 말았다. 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안톤 슈낙(Anton Schnack)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정들었던 물건과의 작별도 포함되어 있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이즘 들어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 하나가 보수, 수선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된 물건들 과의 아쉬운 작별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 소리. 바이올린의 G 현.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우트 함순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크누우트 함순(노르웨이어: Knut Hamsun, 1859년 8월 4일 ~ 1952년 2월 19일)은 노르웨이의 소설가이다. 구드브란스달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방랑 생활을 하다가 24세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체험에서 오는 심각한 심리 묘사는 도스토옙스키와도 비길 정도로 훌륭하다. 작품에 소설 《신비》, 《처녀지》와 희곡 《제국의 문턱에서》, 《투쟁 생활》 등이 있다. 19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스마트 폰이나 오디오의 알람 기능도 있지만 그래도 가장 든든한 것이 자명종 시계 아니던가. 일제 Windsor, quartz 시계를 1984년 12월 사우디 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구입한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으로 해외 출국하여 현장 근무 생활에는 필수품인 자명종 시계를 구매한 것이고 이후 지금까지 항상 내 침대 머리맡에서 내밀한 시간을 같이했다. 알람 기능이 있는 탁상시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더 이상 쓰일 일도 없겠지만 ‘sentimenatal item’ 이들 물건들과 어떻게 작별을 할 것인가, 곤혹스러운 과제이다. 사연이야 있겠지만 또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주위에서 부친의 유품조차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도 보았다. 고인이 사용했던 것을 상속인의 묵시적 양해를 얻어 애지중지 내가 사용하고 있는 수제 아이언 골프채가 그러하다. 사람이 죽으면 그와 함께 했던 물건도 죽는 것과 다름 없으니 살아 생전에 무엇이든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어야겠다는 평소의 생각을 다짐케 해 준 의미있는 경험이기도 하다. 조금은 비싸더라도 품질 좋은 물건을 아껴서 사용하고, 수선하고 수리해서 쓰는 것이 ‘생활 수칙’이다. 구두 뒷굽을 갈아 신거나, 옷을 수선해 입는 것, 가방을 수선해서 사용하는 일들은 괜스레 뿌듯하고 흡족해진다. 그럼에도 하나 둘, 이제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간 정들었던 물건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쉽게 버리지도 못한다. 아내는 아이들이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면 용도가 다 한 물건들은 미련 없이 처분하자고 한다. 책, 의류, 구두는 1차 대상으로 매년 순차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고장 난 채로 침실에 걸려 있는 뻐꾸기 시계는 수리해 놓아야겠다. 1991년 여름 아이들과 20일 가량 했던 유럽 여행길에 독일에서 기념품으로 구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匠人 장인에게 문의하니 수제 기계식으로 작동되는 시계는 오래된 것이라도 수리는 가능하지만 수리비가 만만치 않다 하니 아이들에게 의사 타진은 해 보아야겠다.  ‘餘生의 삶은 정리하는 삶’ 이라고 스스로 정의하였으니 생필품이 아니라면 새로이 구매할 것도 없다. 부지런히 정리 정돈하자고 하면서도 물건일지언정 情 뗀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 ‘앤틱’은 통상 100년 이상은 되어야 한다. 우리 세대가 쓰던 물건이 손주들 세대에 이르면 대충 ‘앤틱’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내가 쓰고 있는 인도네시아 티크 목재의 화장대, 내가 쓰던 장미목의 조그마한 간이 책상, 그럴듯해 보이는 장식장, 아이들 어린 시절부터 사용했던 식탁, 수제 침대등 가구들과 유리, 도자기류 식기들, 여행지에서 구입한 술잔, 사진틀등 이런저런 기념품, 벽에 걸린 그림 등등은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익히 보아 왔던 물건 들이다. 보존할 것은 유지 관리 잘하고 버릴 것은 처분하여 먼 훗날 아들, 며느리가 우리들의 물건 때문에 망설이는 일 없도록 하고 싶다. 행여 제 3자의 손에 넘어 간다 하더라도 그 무엇이든 기꺼이 기분 좋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해 놓는 것이 평생 과제가 되어버렸다.  집 뒤의 논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는 평화로운 늦은 저녁이다. 화답이라도 하는듯이 “개굴 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아 모여서.." 졸리운 듯한 목소리의 손녀 딸이 자장가 삼아 안방에서 제 할미와 함께 부르는 동요가 귀에 들어온다. 나는 책상에 앉아 고정희 시인의 유고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를 뒤적 뒤적이는 고즈넉한 밤 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거유당
마음시툰 용기있게, 가볍게 글.그림 김성라 시 선정 박성우 창비 웹툰이 아닌 시툰 간결하면서 일상의 이야기를 그대로 읽는 느낌이라 좋다. 시툰과 함께 어울리는 시는 더 깊이있게 자리한다. 어떤 책보다 짧지만 큰 여운이 남는다. 눈사람을 만들때 추억이 새록새록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이름이 코코인데 코코 녀석이 왜 저기에서 나오지 하며 읽었다. 간결하지만 익숙해서 더 친근하다. 일상이 한 장면 한 장면 보여 나도 저런 때가 있었어 하며 읽었다. 일상적인 언어지만 다정하다 위로가 된다. 공감대가 크다. 잠시 쉬어가고 싶은 분이라면 몇장 넘기지 않아서 위로를 받을 책이다. 📚 얘기하고 나니까 내리막길처럼 가벼워지고 야트막한 오르막갈에 숨찼던 조금 전의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혼자 버겁게 느껴진 일들을 이야기고 하고 나면 별게 아닌것처럼 느껴진다. 📚 어떤것에 대한 애정은 그것을 마주하고 있을 때보다 그것이 사라진 직후에 커지곤 했다. ✍늘 주변에서 보고 즐길때는 소중한 줄 모르다 없고 나서야 비로소 귀함을 알게 된다. 📚 개미는 용기내서, 가볍게 달려 나가고 있는 건지도 몰라 길 위의 일은 내 몫이야 ✍용기내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할 용기도 없다. 해야 할 일이라면 힘들어도 가야한다고 보여진다. 개미가 밟혀 죽을지라도 길을 가는 이유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은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살아가면서 희노애락으로 가슴을 채워가고 있다고 본다 별새꽃1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국립 현충원을 가다] ☆ 6월 6일 현충일에는 예산 덕산면 윤봉길 기념관을 방문했다. 우리 일행 뒤를 따라 입장하던 어린아이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 입장이 제한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밖에서 입장이 안된 부자가 아쉬워하는 것 같아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주차장까지 가서 차에 있던 여분의 마스크를 가져다 주었다. 아이 아빠가 "새 마스크인가요?" 물어봤다. 조금 서운했지만 내 아이에게 하듯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새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줄을 적당히 매듭을 주어 착용해라" 했더니 아이가 고맙다고 한다. 함께 동행한 일행들이 "박원장님, 복 받을 겁니다" 덕담을 했다. 공공기관은 나름 마스크와 소독제 등 코로나19 관리가 철저하다. 우리 모두 코로나가 종식될 때까지 경계를 느슨하게 하면 안될 것이다. 매헌(梅軒) 윤봉길 (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윤봉길은 한일 강제 병합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08년에 태어났다.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부터 농촌에서 야학을 열어 청소년을 가르치고, 직접 쓴 《농민독본》을 농민들에게 읽도록 해서 독립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게 피해를 입혔다. 이 의거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의거와 함께 ‘한국 독립운동의 2대 쾌거’로 평가받고 있다. 1930년에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만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독립군이 되고자 했지만, 당시 만주의 독립군 부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이에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고, 그곳에서 이봉창의 의거 소식을 들었다.그는 곧바로 김구를 찾아가 자신도 의거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인 애국단에 입단한 뒤 거사를 준비했다. 당시 일제는 중국과 벌인 전쟁인 ‘상해 사변’을 승리로 이끌면서 기세가 한층 높아진 상태였다. 이에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상해 사변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1932년 4월 29일 천장절이 되자, 윤봉길은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지니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행사장 한복판에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인해 상하이의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와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많은 일본군 장교들과 중요 인물들이 중상을 입었다.윤봉길은 의거 직후 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는 일본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오사카로 옮겨진 뒤 같은 해 12월 19일에 총살당했다. [윤봉길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한인 애국단의 단원으로서 일왕의 생일 축하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용감한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의거는 당시 다소 수그러들었던 독립운동 세력에게 큰 힘을 주었다.] ① 윤봉길의 폭탄이 터진 행사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날 일본군 장교와 일본의 중요 인물들은 죽거나 심하게 다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② 윤봉길은 의거 전에 수류탄과 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슴에는 한인 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이 달려 있었다. 이 장면은 윤봉길이 얼마나 굳은 결심으로 의거를 준비했는지는 물론이고 스스로 의거를 자랑스러워 했음을 보여 준다. ☆ 국립 서울현충원 ☆ 6월 7일에는 아침 일찍 국화 꽃다발을 들고 국립서울현충원을 향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공교롭게 어제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다녀오고 오늘은 현충원 참배로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는데, 매년 연례행사로 서울 현충원 현충탑 한가운데 안치되신 육군장교 중위 (군번15955) 고 박광춘님 (큰 아버님)을 유가족 대표로 참배하고 있다. 1927년 4월 22일 생인 큰 아버지는 육사를 9기 졸업하시고 1950.01.14 소위로 임관하여 전방으로 발령, 그 해 6.25 한국전쟁 발발 초기 7사단 9연대 최전방 소대장으로 참전하여 1950.06.29 (육군본부전사자기록) 산화하셨다. 육군장교 중위 (군번15955) 고 박광춘님은 북한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 초기 치열한 전투에서  마지막 한강철교가 붕괴될 때까지 싸우다 산화하셔서  위패로만 [판47. 3면 209 위패번호. 7행5열] 남겨져 지금도 유해발굴 중이다.  유해발굴단과 유가족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기리고 있다. 약 13만 명에 이르는 유해 중 현재 만여 구의 시신과 유품을 찾아냈고 아직도 11만여 전사자들을 추적 발굴 중에 있다. 많이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호국영령들을 대우하고자 하는 정부와 군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젊었을때 인상이 나와 비슷하셨다는데, 곁으로 돌아오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평산
8년 전 일이다 8월 중순이 넘어 서는 날 우리가족은 경기도 화성에서 만날수 있었다.8월이면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4일정도 강원도 철원에 가 있기에 남편만 홀로 지내는 상황이다.그 당시에는 우리의 거주지는 경남 진영에서 거주 하였다.장 시간의 이별의 종지부를 화성의 만남으로 마무리 하였다.남편이 평택에 출장이 있어서 우리는 목요일에 만날수 있었다.화성에는 동서네 가족이 있다.모처럼 만남에 우리모두는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금요일 남편 평택 지사에서 일을보고 진영으로 내려가는 일정을 계획하였다.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다.우리는 점심시간이 훨씬되기 전에 평택에서 출발 진영으로 가는 도중 그냥 가기 아쉬웠는지 남편이 제안을 하였다. 막간의 휴가를 즐기고 가자는 것이였다.아이들도 찬성을 하였고 나도 찬성을 하였지만 어디를 가야 할 줄 몰랐다.남편이 충북 보은 이야기를 한다.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곳 이다.  우리는 목적지 재 설정을 하고 보은으로 향하였다.도착하니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뒤 우리는 우선 식사 해결을 위해 식당에 들어갔다향토음식전문점 우리가 주문한 음식은 산채돌솥비빔밥 총 4개이다주인 사장님이 우리보도 3개만 시키라고 권유하였다아이들이 그때 당시 5살 7살. 둘이 하나로 나누러 목으면 될 거라 하시며 3개만 시키라고 하셨다.4개 달라고 했다. 가지면서 너무 많을 것 인데... ,남길 것 인데... 혼자 말로 그러시면서 가시는 거였다.우리는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런런 저런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손님이 들어왔다. 할아버지와 딸 그리고 손녀 그리 3명의 손님이 들어와 우리 맞으편에 앉아 주문하였다.그분들도 좀 늦은 점심인 듯 싶다.아이들과 이야기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어르신은 미소를 연신 지으신다.예뻐보였나 보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아빠라는 호칭을 거의 안한다.아빠가 아닌 아부지, 5살7살 아이들이 연신 아부지 아부지 하니 식당 사장님뿐 아니라 손님으로 오신분도 아이들이 하는 아부지 그 단어에 연신 웃음을 짓는다식사를 다 마친 후 맞은편 손님이 말은 건넨다.할아버지 연세가 98세이시다고 하시면서 고향이 보은이라 고향에 딸과 손녀와 함께 왔다고 하신다.할아버지연세가 98세 정말 정정 하시다. 탁주 한잔에 파전도 드시고 정말 정정하신 분이셨다.아이들게 아버지라고 잘 가르쳤다고 하시면서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 불러야지 맞아 그러시는 거였다.아이들에게도 용돈도 주셨다. 착하고 예쁘게 잘 자라라 하시는 귀한 덕담까지 너무 감사하였다.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아빠가 아닌 아부지가 참 좋다고 한다.지금도 중1, 초5학년이 되었지만 아빠가 아닌 아부지다  보무라지
여름 시골에선 참 행복했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감자와 옥수수를 쪄서 멍석에 둘러앉아서 쑥을 피워 모기를 쫓고, 별을 보고 은하수 별똥별을 보았답니다. 별이 쏟아지는 풍경 지금은 볼 수 없지만, 그때는 흔하디흔한 풍경이었습니다. 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워서 보는 여름밤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어린 딸은 커서 결혼을 해서 그 딸이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지금도 마냥 어린 딸이 되고 싶은데 말입니다. 아버지와 보던 하늘은 아주 오래전에 낭랑 18세에 사라지고 없습니다. 혼자 별도 은하수도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어릴 때 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웠던 아버지를 하늘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함께 한 시간의 2배 시간이 더 흘러서 어리기만 했던 모습은 머리엔 서리가 내려 하얗게 변했지만, 마음은 늘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가끔 느낍니다. 별이 은하수가 내 눈에 보이지 않듯이 시간의 흐름도 그림자가 되어 남아 맴돕니다. 개구리가 합창하고 모기떼가 극성을 피워도 그때가 그립기만 합니다. 아버지 엄마 오빠 동생과 감자랑 옥수수를 먹으며 서로 큰 것을 먹겠다고 다투던 그때 옥수수 하모니카를 불고 옥수수 누가 더 길게 따는지 내기를 하며 진 사람에게 꿀밤을 먹이며 다투던 그 한여름 밤이 그립습니다. 이젠 다 함께 모일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엄마는 머릿속의 지우개가 너무도 커서 아들도 딸도 지워져서 혼자만의 여행을 하고 계시기에 분주하게 자신의 삶을 살기에 모이기도 힘듭니다. 이젠 젊은 날 엄마의 모습으로 변한 나와 동생, 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빠의 모습 희미해져 가는 그리움을 부여잡고 여름을 맞이합니다. 별새꽃1
#조은산시화집 #조은산올드팝 굿모닝 기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좋은 날 즐겁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늘 감사합니다 오늘의 팝송은 97년 영화 '접속'의 OST A lover's concerto입니다 그 시절 생각에 ㅎㅎㅎ PC 통신 재밌네요 만날 듯 만나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아쉬움... 그러나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꼭 만납니다 하여간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화도 영화지만 이 노래가 굉장한 히트 쳤습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사랑하는 아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노트북> 미뉴에트 G장조를 편곡해서 부른 A lover's concerto 정말 좋습니다 멋진 하루 보내세요 https://youtu.be/N2HCp1tL4CQ 인생은 미로 찾기 / 조은산 인생은 미로 찾기와 같다 이 길이겠지 하며 한발 한발 걸어갔는데 길이 없어 좌절도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고 또다시 길 떠난다 "가는 도중 이 길이 맞겠지?" 한 번쯤 의심도 해보지만 자신의 판단을 굳게 믿으며 계속해서 자기만의 길을 간다 계속되는 실패 속에 인생의 쓴맛을 느끼면서 반성하며 다시 충전한다 답을 못 찾아 헤맬 때는 멘토를 찾아 도움을 받기도 한다 부모, 친구, 멘토의 도움으로 다시 굳게 일어서서 심기일전하여 의지를 불사르고 또다시 길 떠난다 우리는 실패와 도전 속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은 부모님도, 멘토도, 친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조은산
용산구 남영동은 나하고 인연이 있는 동네이다. 옆 동네인 청파동에 자리 잡고 있는 중고교 6년을 다니느라 집이 있는 성북동에서 버스로 등하교를 했고 남영동 정류장에서 내려 학교까지는 10분 남짓 걸어야 했다. 성북동 인근 혜화동의 ‘惠化 혜화’는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60년대 서울 시내 제과점이 극히 드물었던 시절, 유명세를 날리던 ‘아카데미 제과점’이 있던 혜화동 로터리에서 머지않은 거리의 혜화초등학교가 모교이다. 집 바로 뒤의 보성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합격 안정권이 아니라 하여 ‘착할 善, 이웃 隣’ 善隣 선린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일류 컴플렉스의 시작인 셈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꼭 가고 싶었던 학교에 못 가게 되어 낙심이 컸던 탓인지 나의 중고교 시절은 그저 무덤덤하게 지냈다는 생각이다. 돌이켜 보니 착하게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으뜸으로 치는 것, 다닌 학교의 校名 교명에서 비롯된것만 같다. 내가 추억할 수 있는 남영동 버스정류장 인근의 금성 극장, 성남 극장, 파리 제과 등등 이제는 모두가 사라진 이름들이다. 언제쯤이나 ‘민주 인권 기념관’도 둘러 볼 겸, 4호선 숙대입구 역에서 내려 굴다리 지나 청파동 숙명 여대, 그 뒤로 효창공원을 거쳐 모교까지 옛 시간 곰씹으며 한 바퀴 돌아보고 싶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 분실은 내가 학교 다녔던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는 나대지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976년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현대 건축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알려진 김수근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건축물의 용도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기꺼이 설계, 시공을 맡았으니 사업 수완을 갖춘 재능 있는 건축가일지 모르겠지만 지식인으로서 존경할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05년까지 경찰 보안분실로 사용되었다가 과거사 청산 사업의 일환으로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로 역할을 바꾸어 운영되었다. 2018년 12월 26일 법적 관리권이 경찰청에서 행정안전부로 이관되었으며, 현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운영중으로 2022년 ‘민주 인권 기념관’으로 정식 개관 예정이라 한다. 먼 훗날 우리 세대는 오랜 가난을 벗어나게 한 국가 경제 발전에 공헌하고 군부 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의 초석을 이루어 낸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나도 가혹한 조건의 중동 사막에서 2년여 근무한 경험이 있으니 산업 역군으로서 국민 경제 발전에 일조하였다 할만 하다. ‘6.10 민주 항쟁 기념식’을 우연히 라이브로 시청하면서는 민주화를 위해 소시민인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까맣게 잊고 지냈던 기억 저편에 떠오른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넥타이 부대’라 불리웠던 데모에 적극 동참한 일 이다. 상급자에게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시위가 정점이었던 시기에 이틀 연속해서 명동으로 광화문, 시청 앞으로 달려 나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군중들과 함께 주먹 쥐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대통령 직선제’를 외쳐댔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유시민 작가가 서울대 재학 시절인 1985년 5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은 뒤 제출한 항소이유서에 인용함으로서 많이 알려졌으나,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 Nikolai Alkseevich Nekrasov(1821~1878)의 詩 ‘신문 열람실’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는 러시아 시인이자 잡지 편집자,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였으며, 지주 귀족 출신의 아버지가 농노를 학대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이를 계기로 민중의 아픔과 비참한 생활상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주윗 사람들은 내가 온순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하지만 불의라 생각되면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일면도 있기에 좋아하는 名言이다. ‘불의에 분노하지 않는 자,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내가 패러디 해본 것이다.  33주년 기념식이 진행된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던 '민주 인권 기념관' 예정지이다. 대통령으로서는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하기 시작함으로서 이제는 어엿한 국가 기념일 행사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민주화 운동과 인권 향상에 앞장선 공로로 열두 분께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다. 마치 공기처럼 아무런 의식 없이 누리고 있는 소중한 민주화에 대한 평소 나의 관심도는 어느 정도였을까. 바로미터가 될듯 싶어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대통령이 훈장을 직접 수여하는 동안에 내가 알고 있는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들으면서 적어 보았다. 추상적 의미의 '민주화'를 구체화 한다면, 우리 모두가 조금 더 나은 생활,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기본 토양이 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에, 유공자 분들에게는 항상 마음의 빚을 지고 사는 기분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 중 일부를 옮겨 본다. “.....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국민이 주권자입니다. 국가는 국민의 삶을 위해 존재하고, 언제나 주권자의 명령에 부응해야 합니다. 선거로 뽑힌 지도자들이 늘 가슴에 새겨야 할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의 두 날개로 날아오릅니다. 소수이어도 존중받아야 하고, 소외된 곳을 끊임없이 돌아볼 때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합니다. 우리는 마음껏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지만, 남의 몫을 빼앗을 자유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웃이 함께 잘 살아야 내 가게도 잘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하고 보다 평등한 경제는 제도의 민주주의를 넘어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실질적 민주주의입니다. ......” 노동운동가로 근로기준법과 함께 제 몸을 불사른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1987년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됐던 서울대생 박종철의 부친 박정기, 연세대생 이한열의 모친 배은심 세 분은 먼저 간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분들이다. 70년대 전후 한국 민주화 운동과 기독교 사회운동의 지도자 박형규 목사, 지학순 전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 당국과 협상하는 등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고 조비오 신부님 세 분 모두 내가 존경하는 종교인이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인권 변호사 황인철,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설립에 앞장선 조영래 변호사의 글 모음 책은 서가의 중앙에 꽂혀 있다. 진보 신학자이자 民主總長 민주총장으로도 불리운 김찬국 상지대 총장,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으로 민주 언론 운동 시민연합 초대 이사장을 맡았던 성유보, 모두 열 분은 글이나 책, 미디어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분 들이다. 나머지 두 분의 이름, 전국교수협의회 대표 등을 맡으며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고 김진균 서울대 명예교수, 전국농민회총연맹의장을 밑으며 농민 운동을 이끈 고 권종대 선생님은 처음 알게된 분 들이다. 12분 중 10분의 이름을 알고 지냈으니 점수로 환산하면 80점으로 만족할 만하다. 새벽 5시, 눈 뜨면 작업복 걸쳐 입고 뜰에 나가 잡초도 뽑아주고 텃밭에 물주고 가꾸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호미를 들고 하는 한 두 시간 남짓의 노동이지만 뜰 가득 지저귀는 새소리, 풋풋하고 상큼한 아침 공기가 ‘코로나 19’의 엄중한 시국임을 잠시 잊게 한다. 이어서 요가, 호흡훈련,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치고 샤워를 끝내는 시각이 대충 10시 전후이다. 그제야 잠이 깬 아내가 커피, 과일 챙겨나오면 거실에서 함께 보게 되는 아침 뉴스가 6.10 민주 항쟁 기념식 생중계로 대체 되는 바람에 예기치 않게 시청하게 되었다. 한 시간 남짓 진행된 기념식은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 윤선애 ‘그날이 오면’ 그리고 ‘광야에서’ 제창으로 마무리 되었다. 모처럼 옛일 더듬어 회상케 되어 눈시울 붉히며 가슴 뭉클하게 지켜본 기념식이다. 소회를 남길만 하다는 생각에 써 본 글이다.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부르는 노래 ‘광야에서’ 가사 전문, 그리고 안치환 노래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sGxkOf0VTY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에 핏줄기 있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거유당
딸이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정형외과에 들러서 다리에 깁스를 하고 점심도 먹을 겸 분식 집에 앉아 있는데 어떤 여성이 오더니 대듬 "너무 오랫만이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런데서 이렇게 만날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너무너무 반가워서 미치겠어~"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긴다. 솔직하게 난 안면인식 장애가 좀 있는지라 그 여성이 민망할까봐 그냥 "그래, 너무 오랫만이지? 넌 어떻게 지냈니?" 라면 말을 받아 주었다. 사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저히 누군지 생각이 나질 않아서 자리를 피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몇 마디 담소를 나눈 뒤 딸애를 그 여성에게 인사를 시키니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밖에 나갔다 오더니 하얀 봉투를 건넨다. 봉투를 건네자 말자 그녀는 나에게 명함을 주며 꼭 다시 연락을 하자며 말하고 동료들과 자리를 떠났다. 보자말자 봉투를 주니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무슨 사기를 당하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하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봉투를 열어보니 50만원 정도의 돈이 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나에게 돈을 주니 사기를 치기 전에 미끼로 주는 돈인 건 아닌지 의심을 하면서 집에 돌아오자 말자 그녀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받은 명함을 꺼내 들었다. 변리사라고 적혀 있는데 직함만 들어봤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름 급수가 높은 공무원인 것 같았다. 난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 했기에 더욱이 공직에 있을 만한 친구를 학창시절에 사귄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무리 예전 일을 기억해 내려고 갖은 애를 써 봐도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다. 명함에 적인 번호로 연락을 하니 그 여성이 연락을 줘서 너무 고맙다며 연신 감사와 반가움의 말을 전하기 바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결혼은 언제 했느냐?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 학교 때 친구들은 지금도 만나느냐? 물어 보는데 처음에는 그냥 대충 둘러 대다가 도저히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돈을 받은 찝찝함과 생각나지 않는 얼굴을 기억해 내기 싫음과 혹시라도 사기 치려고 나에게 접근한 건 아닌지 의심을 벗어 던지기 위해서 돈을 돌려 주려고 전화를 한 거라며 솔직히 당신이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서 돈을 돌려 주고 싶다며 했다. 그러자 그 여성이 갑자기 펑펑 울면서 나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난 부산에 잠깐 전학을 간 적이 있는데 워낙 낯도 많이 가리고 외향적인 성격이 아닌지라 혼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걸 좋아했다. 부모님 일 때문에 잠깐 1년만 부산에 상주를 하는지라 딱히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냥 학교만 충실히 다니면서 다시 친구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갈 날만 기다렸기에 혼자 조용히 지냈다. 독서를 좋아하던지라 유일하게 학교 도서관에 자주 갔는데 거기서 나를 처음 알게 되었단다. 조용한 성격이라서 항상 도서관에서 책만 읽고 있었는데 어느날 학교 옥상에 올라갔다가 여럿 아이들이 한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 애를 구해 주었단다. 기억은 나질 않지만 난 또래 애들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있었던지라 아마도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를 도와줄 수도 있었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 이후로 그 애는 도서관 먼 발치에서 날 응시하며 항상 자길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느낌으로 시간이 있을 때 마다 도서관에서 날 지켜 봤단다. 게다가 도서관에서 절도사고가 있었는데 그 때도 내가 직접 나서서 누명을 쓴 그애를 변호하며 도와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 후로 정말 친구가 되고 싶어서 우리 반을 찾아왔을 땐 이미 난 전학을 가고 난 뒤였고 그 애는 중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 날 그리워 했다고 했다. 부산에서 상경해서 미친듯이 공부를 해서 지금의 변리사가 되기 까지 숱한 고생과 외로움을 이겨 내고 늦으막에 지금의 자기를 지켜주는 진짜 수호신을 만났다며 결혼할 사람과 함께 같이 만나서 술한잔 하자며 펑펑 울면서 말하는데 얼마나 감정이 북 받혀 눈물이 나던지....사소하게 했던 행동 하나에 사람의 인생에서 이렇게 중요하게 작용을 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가슴 속에 담고 살면서 다시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게 정말로 신기했다. 여전히 난 뚱한 성격 탓에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이 남편과 아이들만 바라보며 살았지만 앞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넋두리와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되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뚱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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