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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추천스토리

프롤로그5월달은 참 행사가 많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석가탄신일 등등누구나 살아가며 존경하는 선생님이 한분 쯤 계실텐데 나는 스승님 복이 있어서인지 학창시절 여러분의 존경할만한 스승님을 만나뵌 듯 하다.그 가운데서도 초등학교 3학년때 사제간 인연이 닿은 최소자 선생님을 단연코 손꼽게된다.내가 3학년때 50대후반이셨으니 지금 연세는 상수(100세)에 가까운 나이실 듯하다.이 신변잡기는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으로부터 41년전 (1980년) 필자가 초등학교 3학년인때로 돌아간다.--------------------------------------------------------------------여느 때와 같이 오늘 하루도 학교에서 뭘하며 하루를 놀까를 생각하며 발걸음도 가볍게 등교를 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출산이 얼마 남지않아 내일부터 너희를 당분간 못 볼거같다는 폭탄선언에 이어 우리 10반은 3~4명으로 쪼개서 다른반에 배치된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하셨다.(7~80년대 초등학교 다니신 연령대는 잘 알것이다.반자체가 공중분해되며 3~4명 단위로 다른반에 가서 텃세받으며 담임선생님이 복직하실때까지 눈칫밥을 먹는 제도였다 우리10반교실은 담임선생님이 해산하시고 다시 복직될때까지 임시로 잠구어 놓고 비워놓게 된다.다른반으로 더부살이 이동할때는 내가 쓰던 책상걸상에 책가방 미술도구 화판까지 이고지고 육이오 피난민이 따로없었지만 지나고보니 다 추억이다.)새로 배치되면 그 반 아이도 아니고 언젠가 돌아갈 애들이라 참 이도저도 아닌 것이 이미 2학년때 한번 경험해 본적이 있어서 하늘이 노래지고 슬퍼지는 느낌적 느낌이었다.선생님의 조례 후 우리들은 이제 당분간 헤어진다는 생각에 서로를 위로하며 이때까지는 볼수 없었던 선생님이 평소 그렇게 강조하셔도 안되던 급우애를 거짓말처럼 실천하고 있었다나는 여자짝꿍에게 내가 제일 아끼던 새것 왕구슬을 이별의 징표(?)겸 선물로 수줍게 건넸다(여학생이 무슨 구슬에 흥미가 있겠냐마는 아무말없이 받아준 짝꿍이 참 고마웠다 참 예쁜 짝꿍이었는데 짝이되고 얼마되지 않아 이런 불행이 내게 찾아온것이었다. 참 지지리 복도없지 쩝쩝)우리들은 그 또래 어린이들 답지 않게 “왜 이런시련이 내게만 오냐”는 팔자타령을 하며 그날은 단축수업을 하고 운동장에서 놀지도 않고 일찍들 귀가하였다.다음 날 원치않는 임신(?) 아니 이산가족이 될 우리처지를 그리며 처진 어깨로 학교에 등교하여서 모두들 풀이 죽어있는데 처음보는 할머님에 가까운 50대후반의 수수한 여자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도시락 놓고간 친구의 할매가 학교에 오셨나 싶었는데 그분이 바로 임시담임을 맡아주신 최소자 선생님이셨다.지금으로치면 임시 담임교사라고 생각하면 되나 그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 없던 1980년초반 시절이고 정년퇴직을 하신 선생님께서 우리를 원래 담임선생님 오시기전까지 맡아주신 상황이었다.(지금말로 단기 계약직 이셨던거 같다)통상 출산하시고 원 담임선생님께서 3개월 정도면 복직하셨으니 우리와의 주어진 시간은 3개월 남짓이었다. 이때까지 상황을 눈치로 파악한 우리들은 이산가족의 아픔 따윈 저멀리 떠났구나하는 안도감과 어제까지 기적적으로 실천하던 급우애를 바로 안녕하고 잔망진 개구쟁이로 0.1초만에 복귀하였고 은근히 임시(?)비정규직 老선생님을 만만이 보고 평소의 도를 넘는 장난을 칠 궁리뿐이었다.그러나 우리의 임시담임은 이미 교육계 짬밥을 정량 다 채우시고 하산하셨다가 적적하셔서 손주들 재롱보시려 컴백하신분이시니 우리 10살 조무래기들이 상대할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셨다.그 시절은 숙제를 안해오거나 말썽을 부리면 통상 여선생님들은 손바닥을 체벌하시고 남선생님들은 엎드려 뻗쳐 같은 기합을 많이 주셨는데 우리 고수 최선생님은 벌주시는 차원이 달랐다.범죄도시란 마동석주연의 영화를 보면 “진리의 방”이라고 있는데(악질깡패를 취조하는 임시가림막 공간) 우리들은 말썽을 피우면 예외없이 교실끝 “고독한 섬”이라는 별도의 자리로 이동해야했다.고독한 섬은 교실 맨뒤에 짝없이 별도 책상에 혼자 뚝 떨어져 앉고 하루동안 친구들과 말을 할 수 없는 강제묵언수행을 해야하는 당시 개구쟁이의 절정에 있던 우리 남학생들에겐 정말 체벌보다 억만배 두려운 벌칙이었다.또한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박질을 하는 우리 남학생들을 귀신같이 다루셨는데 통상 다른 샘들은 친구와 싸우거나 다투면 벌이나 선생님의 강압적인 권위에 눌려 마음에도 없는 강제 화해악수등을 시켰는데 이는 당장 눈앞에 계신 선생님이 두려워서일뿐 그렇게 앙금이 풀릴리 없어 방과후 다시 만나 “황야의 결투”라는 우리들의 2부 스테이지가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의 정해진 코스였다.그러나 우리 노선생님은 여느 샘님과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식이 남달랐다.만일 개똥이와 소똥이가 싸웠다면 모두들 책상을 뒤로 밀고 교단이 임시무대가 되어당시 싸움의 발단을 제공한 다른 학우들까지 참여시켜 재연극장을 여시는거였다.그러면 사건당사자는 선생님께 상황 설명을 하며 슬로우비디오로 싸움 장면을 재연하며 관객인 학우들에게 중간중간 자신의 억울함을 읍소해야 하는 역할재연극을 시연해야 하는것이었다.이 재연극을 하다보면 합이나 대사가 맞지않아 여러 차례 폭소가 터져 나오고 나중엔 왜 싸웠는지도 다 잊고 당연히 2부순서 황야의 결투 코스도 없으니 이런 모든 걸 꿰뚫어보시던 선생님은 진정 고수(?)셨다.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재연극을 보시고 선생님께서 벌칙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시는게 아니고 반장,부반장,줄반장등으로 구성된 5~6명의 학급 임원으로 지금의 배심원단 같은걸 구성해서 벌칙등도 우리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시는 거였다.(우리들은 손바닥 몇 대 체벌보다는 “고독한 섬”으로 보내 까불이들에게 최대 저주인 벌칙을 추천해서 악동들의 괴로움을 은연중 즐겼던거 같다)인자하신 할머님 같은 노선생님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선생님이 임시 담임이 아니라 이대로 우리를 쭉 돌봐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빠져들 무렵 필자의 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학교수업이 끝나면 여느반과 마찬가지로 한줄 7명 안팎으로 월화수목금토 돌아가며 우리들도 교실청소를 하고 귀가해야했는데 우리반에는 삼룡이(놀랍게도 실명이다 삼룡이 조부가 세 마리의 용이라는 간결한 의미로 이름에는 잘쓰이지않는 석삼자와 드래곤 용으로 지어주신 그때나 지금이나 드문 이름이었다. 50평생 이름에 석삼자를 쓰는 사람은 이 친구말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자세한 삼룡이의 가정 형편은 모르나 모친이 집을 나가 아버지가 삼룡이를 키우고 삼룡이의 아버지도 지방으로 건축일을 다녀서 어린나이에 할머니와 지내는데 늘 당당하고 카리스마가 있어 기죽지 않고 친구들과 잘지내는 제법 똘똘한 친구였다.삼룡이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인지 나름 교실에서 자신만의 부업(?)을 했는데 그건 다름아닌 요즘말로 “청소당번 대행서비스업”이었다삼룡이의 사업내용은 비교적 단순명료했다.예를 들어 월요일 개똥이가 청소당번이라 가정하면 개똥이는 청소대신 삼룡이에게 새연필 한자루나 지우개 또는 새공책 한권을 준다(철저한 선불운영방식이었으나 자주 이용하는 단골고객에는 드물게 후불식 신용거래도 하곤 했다.훗날 사업가의 기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학용품을 수령한 삼룡이는 월요일 청소당번이 아니지만 개똥이대신 청소를 한다설렁설렁하던 우리와 달리 열정적으로-자본주의 동기부여 때문이 아니었을까-청소를 해서 청소책임자인 줄반장도 우리반 누구도 삼룡이가 부업으로 같이 청소하는걸 환영했다.그가 있으면 청소가 빨리 끝나고 귀가가 빨라지니 우리로서는 당연히 그를 환영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해본다.그렇게 누이좋고 매부좋게 흘러가면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지금 이글도 쓰여지진 않았을 것이다.당시 7-80년대 초등학교 앞에는 문방구가 있는데 하교길 초딩에게는 그야말로 간단한 군것질거리부터 플라스틱 조립식 장난감 클로버문고(만화책)당시 월간지 소년중앙 새소년 어깨동무등등 볼거리 먹거리가 그득한 그야말로 초딩들의 꿈의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었다(오죽하면 당시 초딩들 장래희망으로 문방구 주인이 심심찮게 나올정도 였으니 말이다)여느때와 같이 문방구의 통유리 장난감 진열장을 점검하던 우리 개구쟁이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물건너온 일본 장난감로봇모형이었는데 당시 플라스틱 조립식 10원~150원하던 모형만 갖고 놀던 우리들에게 초합금모형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초합금은 훗날 커서 알게 되었지만 구리나 주석등을 합금하여 사출한 장난감으로 주로 일본수입제품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런 고급진건 비싸서 문방구에 잘들어오지 않았고 국내에서 일본제품을 카피하여 만들어진 카피품은 종종 구경할수 있었다.(저작권같은 개념은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물가로도 고가라 명절에 세배돈 같은 특별용돈을 몇 번 모아야 꿈 꿀수 있던 초딩남학생이 손에 넣기엔 쉽지 않은 물건이었다.이 초합금을 보고 어떻게든 갖고 싶었기에 그날부터 집에와서 부모님을 졸라댄던거같다.하도 조르니 모친께서 가격을 대충 물어보시고 단칼에 안된다고 단호히 못 밖으셨다.그러거나 말거나 한 일주일을 계속 졸라대니(중간중간 매타작도 당해가며) 귀찮으셨는지 이루기 힘든 제안을 하셨는데 그건 다름아닌 “착한 어린이상”을 받아오면 생각해보시겠다는 것이었다.그 시절 학교 표창장은 성적우수표창장과 다른 학우에 모범이되는 품행이 단정한 학생에게 주어지는“착한어린이상”이라는게 있었는데 성적 표창장은 종종 받아봤지만 착한어린에게만 준다는 그 상은 개구쟁이 정점에 올라있던 필자에게는 아예 일찌감치 포기했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상이었다.필자가 착한어린이상을 받는다는건 지금 메이저리그 류현진투수가 뜬금없이 은퇴하여 단거리 육상선수로 전향하는거 만큼이나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초합금 로봇장난감은 쉽게 포기되지 않았고 하교길 초합금 로봇이 잘 진열장에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주요 일상으로 자리잡던 즈음 결국 필자는 해서는 안될 큰 결단을 내리고 만다.그래 “착한 어린이상”을 타자!!!!!!!!!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사실 로봇을 떠나서 난 원래 착한어린이였어라고 스스로를 자기암시 그리고 합리화 시키기 시작했다.(살짝 맛이가며 현실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르게 되었고 훗날 동생은 그 당시 이유없이 먼하늘을 보며 배시시 웃는 형이 너무 무서웠었고 조만간 큰 사달이날 것을 혼자 짐작하였다고 전한다.)이때부터 평소 개구진 생활을 버리고 철들어 고향에 돌아온 탕아(?)처럼 오로지 한가지 목표 “착한어린이”가 되기 위해 필자는 개과천선하게 된다.싸우는 친구는 말리기 여학생들 무거운 주전자 대신 들어주기 청소당번일 때 칠판 지우개 깨끗이 털기 학급 미화 게시물 성실히 제출하기 수업시간에 친구와 떠들지 않기 등등 참으로 많은 평소 필자의 생활상에 역행하는 만행이었으나 문방구 진열장의 초합금 로봇만 생각하면 지금 이런 시련들은 내겐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곤했다.이때 부반장하던 친구가 다른 학교로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되서 당시 필자는 급우 -특히 여학우에게 짓궂던 필자가 이 무렵엔 여학우들의 수호천사로 거듭나 갱생의 길을 걸었으니 인기는 폭발 직전이었다.심지어 짝꿍에게는 러브레터도 받았다.^^v -들의 압도적인 몰표로 부반장직에 무혈입성하게되니 이는 착한어린이로 강제로 살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수확들이 아닐 수 없었다.(필자는 계속 이렇게 착한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으나 자신을 속이며 언제까지 계속해나갈 자신은 솔직히 없었다)어느 정도 필자의 선행이 쌓여가고 동료 개구쟁이 남자급우들에게 필자가 지독한 독감의 휴유증으로 실성(?)했다라는 평가가 대세로 굳어질 무렵 그날은 필자가 청소당번인 방과 후 나른한 오후였다.그날 우리선생님께서는 일이 남으셨는지 얼마 전 치른 중간고사 시험지를 빨간 색연필로 채점하고 계셨고 필자는 선생님께 점수를 더 따려고 미친 듯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청소가 끝나고 검사받고 귀가할 무렵 선생님께서는 따로 필자를 부르셨다.이것저것 물어보시던 선생님은 혹시 너 “착한어린이상”을 받고 싶어서 그런거냐고 넌지시 물어보셨다. (또래 친구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아마 고수이신 선생님 눈에는 갑자기 눈에 띄게 행동거지가 달라진 필자를 꿰뚫어보셨던거 같다)“착한 어린이”상은 두 달에 한명씩 선정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필자의 달라진 모범적인 행동들을 수차례 칭찬하시고 이번 상은 아쉽지만 늘상 청소를 도맡아하는 삼룡이가 받고 필자는 다음에 받으면 되겠다고 선선이 말씀하시는거였다.하늘이 노래지고 뭔가 알 수 없는 억울함 삼룡이는 학용품 댓가를 받고 청소하는 사실을 선생님이 모르시니 나는 피해자야라는 뭔가 알 수 없는 복잡한 심경에 필자는 해서는 안될 그릇된 행동을 하고 만다.(살면서 때로는 후회되는 일들을 하고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라도 바로 잡고 싶은 일들이 누구에게나 몇가지씩 있을 것이다. 필자도 이때가 그랬었던 일 중 하나이고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삼룡이의 청소대행사업(?)을 선생님께 샅샅이 고자질하고 “이런말씀 드리긴 뭣하지만 사실 이상은 제가 적격자입니다” 하니 선생님께서는 일단은 박장대소하고 크게 웃으셨다.그리고는 평소의 인자한 미소를 싹 거두시고는 무섭게 필자를 꾸짖으셨다.“친구가 그릇된 길을 가는데 어떻게 너희들은 그런 친구의 궁핍한 환경을 이용할수 있니?너희들에게 정말 많이 실망했구나........거기에 동참했던 알면서 묵인했던 너희들 모두 내일 단체로 혼날 각오들해라"담날 의자들고 우리반은 대부분 영문도 모른체 단체기합을 받았고 삼룡이를 고객(?)으로 이용해 본 적 없어 억울하다는 일부 여학우들의 읍소에 선생님은 “부당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침묵하는 다수가 더 나쁘다”는 당시 10살 어린 우리머리로는 다 이해되지 않았던 선생님의 말씀이 지천명의 나이인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다.이제 고자질쟁이에 무늬만 착한어린이 지망생인 필자는 산토끼 쫓다가 집토끼도 잃고 닭쫓던 개처지에 급우들에게는 밀고자로 전락하여 맘을 졸이는 처지로 지낼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필자의 고자질로 잘나가던 청소대행업(?)이 망한 삼룡이가 앞장서서 단체기합을 받은 반아이들과 밀고자를 색출하겠다고 난리부르스를 쳐댔으나 - 최근 개구쟁이 생활을 벗고 새사람 실성한 어린이로 거듭난 필자는 늘 아이러니하게도 우선적으로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 - 진범을 찾을리는 만무했다.떠나시는날까지 선생님은 필자의 고자질을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지켜주셨다. 이제 착한 어린이상은 물건너갔고 그렇다고 다시 개구쟁이로 돌아가기는 어정쩡할 무렵 원래 담임선생님께서 무사히 해산하시고 다시 복직하신다는 풍문이 돌 무렵이었다.그날은 일주일에 한번 돌아오는 방과 후 청소날이었는데 청소마치고 귀가하려는 필자를 선생님께서 조용히 부르시는거였다.이제 얼마 뒤 선생님은 임시담임교사가 끝나서 원래생활로 돌아가시는데 그 사건뒤 필자를 지켜보니 여전히 급우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잘 지내니 “착한 어린이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 이제는 상을 줘도 되겠다는 말씀이셨다.선생님이 떠나도 지금처럼 성실하고 급우들에게 모범이 되고 훗날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로 자라길 바란다고 하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선생님이 떠나시던날 우리반 모두에게 부리보콘을 돌려주셨고 개구쟁이들에게 공부 잘하라는 상투적인 말대신 “부당한일에 결코 침묵하지 말고 어디서든 정의롭고 멋지게 살라”는 말씀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셨다.새로 복직한 담임선생님께 필자는 착한 어린이상을 받았고(최선생님이 뽑아놓고 가셨다) 그뒤로도 성장하며 학창시절 여러 상을 받아봤지만 아마 이때 받은 상이 필자가 살면서 받은 표창중 가장 자라나며 인성 형성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졸업 후 바쁘다는 핑계로 선생님을 따로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선생님의 마음에 와 닿던 교육방식과 인자하신 미소가 살면서 불현 듯 기억나고는 한다.매년 찾아오는 스승의 날이면 멀리서나마 선생님이 늘 건강행복하시길 기원드려본다.에필로그한 십수년전쯤인가 싸이코월드 알라븅스쿨등이 열병처럼 우리세대에 오래된 친구찾기로 유행할 때 필자도 다른 동창을 통해 삼룡이의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들은 기억이 난다.삼룡이는 대학은 진학하지 않았으나 일찍 사회생활을 하여 여러 자영업들을 거쳐 운동화 세탁물등을 빨아주는 클린땡땡이 본점의 창업주가 되어서 알부자가 되었다는 믿기힘든 소식이었다.(혼자 많이 웃었던거 같다 결국 청소대행업으로 성공했구나 친구야 하하 그리고 미안했다)이름도 개명했다고 하는데 새로 개명했다는 이름은 내입에 붙지않았고 나에겐 초딩시절 그 삼룡이란 이름이 지금도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그때 선생님이 부족한 개구쟁이에게 수여해주신 그 상장 덕분인지 필자도 그럭저럭 사회에서 꼭 필요한 중년어른이로 잘 자라난거 같다.내일은 스승의 날인데 평소에 연락을 드리지 못했던 선생님께 따로이 안부전화 한통 올리면 좋을거 같다.학창시절 좋은 가르침을 주었던 선생님들 그리고 지금도 우리 학생들을 불철주야 바른길로 이끌어주시는 이땅의 모든 스승님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나도 한번 슬며시 따라 불러본다.“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하버드룸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온 오늘, 코흘리개 시절 불알친구들이 만나는 날이다. 서울,인천, 대전,세종 경향 각지에서 삶의 둥지를 튼 친구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언제나 모이면 돌아가는 그때 그 시절, 골목길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도둑놈 잡기 놀이 등으로 하루 해가 짧았던 시절의 추억담이 피어 올랐다. 먼저 도둑놈잡기 놀이를 하다가 담장과 함께 넘어가서 집주인에게 혼나고 담장값을 물어주고 노력봉사까지 하느라고 고생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B는 형제가 함께 참여해서 두 배로 변상해 주고 부모님께 혼났던 얘기를 신이 나게 늘어 놓았다. 나는 타잔놀이를 하다가 뒤로 넘어져서 뇌진탕으로 졸도하여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을 놀라게 했던 일이 늘 친구들의 안주거리가 되었다. L은 M과 다투다가 M이 자기집 개를 풀어놓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집으로 도망쳤던 추억을 떠올리고 G는 추석 무렵에 새 옷을 부모님께서  사 주셨는데 폭음탄에 불을 붙여서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옷이 타버려서 부모님께 매를 맞고 울었던 추억 등, 밤이 깊어도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이제는 환갑을 넘기고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만날 때마다 나이를 잊고 십대가 되어 낄낄거리고, 장난치다 보면  하나 둘씩 취해가고 내친 김에 밤거리 순례에 나섰다. 성심당을 지나 대흥동 천주교회를 끼고 돌면 거리는 온통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최근 다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곳인데 대학 시절 즐겨 찾았던 '진로집'을 찾아 즐겨 먹었던 두부 두루치기를 시켜 놓고 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숙소인 호텔에 돌아 오니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예전에 즐기던 '월남뽕'이란 화투놀이를 하려고 화투를 펼쳤으나 하나 둘씩 자리에 눕는 바람에 미연에 그치고 말았다. 나이가 들면 아침 잠이 없어진다더니 4시부터 하나 둘씩 부스럭 거리다가 눈을 뜨고 사우나를 하게 되었다.호텔 근처에서 조반을 먹고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시켜 놓고 세상 사는 이야기며, 사회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다가 왔다. 벌써 이별이라니 만난 지가 한 시간도 안되는 줄 알았는데...우리는 다음 만날때까지 건강을 다짐하며 악수를 나누고  각자 삶의 보금자리로 떠났다. 아, 아쉬운 1박2일이었다. 단원
국내관광이야 별 문제가 없지만 해외 관광시에는 늘 변수가 생긴다 내가 가이드 시작 하면서 전용 차량 기사 비위를 잘못 건드려 일정을 소화를 못시킨 경우가 발생했다 일단 가이드랑 기사는 소통이 원활해야 한데도 불구하고 난 사무실에서 준 일정표대로 코스를 진행을 하려하는데 첫날 공항 미팅에서 이코스로 갈꺼면 길도 막히고 오늘 다 못돌아 본다고 하는걸 개무시 했다 안된다고 손님에게 일정대로 가야지 하나라도 빠지면 크레임 들어오면 난 내목을 그는 시늉을 하면서 강행을 시켰다 ㅋㅋ 아니나 다를까 성수기에 관광지는 미어터지고 일행은 제시간에 모이지 않고 아무리 시간 약속 안지키면 일정을 소화 못한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나만 죽쟈고 뛰어 다니면서 쇼핑중인 손님 찾으러다니고 헉헉 거리고 목이 터저라 이름 부르며 찾아다니고 ㅋ ㅋ 그렇게 코스를 간신히 끝내고 이동 중에 기사말이 가슴 절절 와닿았다 기사가 현지 사정을 제일 잘아는데 내가 건방 떤건 아니지만 ㅠㅠ후회막급이다 오늘은 자존심 상해서 굽히기는 싫고 가는데까지 가보고 결국 못돌면 현지 사정 핑계대고 시간엄수 못한 손님탓으로 가야지 별수없다 생각 하고는 열나 집합 시간 엄수해달라고 손님을 쪼아댓다 사실 투어 나갈때는 안차던 손목시계를 차고 나간다 시간과 싸움이고 기사와 팀웍이 잘맞아야 가이드가 난감할때 도움도 받고 그 투어는 성공인 셈이다 결국 중간에 기사한테 숙이고 너말 듣는건데 ㅋㅋ 했더니 내말이 맞지? 현지는 가이드도 모르고 도로사정은 더더욱 모른다 가이드가 잘난 척하면 우리도 나도 모르쇠란다 분명 돌아가는데 알려줘도 안들으면 할수 없지않냐고 한다 그말에 미안하다 도와달라고 하고 오늘 아무래도 이대로라면 한 코스는 못가고 손님은 손님대로 가이드가 쪼아대고 지쳐있으니까 오늘 한코스를 빼고 그걸 내일 넣는다면 어떻게 진행을 하면 좋겠냐니까 코스를 정리 해주었다 하긴 사무실 op가 도로 사정을 알고 코스를 잡을리도 만무하고 알겠다고 하고 손님들에게 중간에 코스 변경 사유를 일러주고 오늘 빠지는 코스는 내일 채운다고 말을 하고 이후 여유롭게 진행을 했다 이후도 나는 기사와 협업 하는 마음으로 무탈하게 끌어가고 손님들에게 안전운전 해주는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수있도록 유도하는것도 잊지않았다 첫날 도착하면 짧은 일정에 몇마디 못쓸 일본어지만 돈 들어가는 거 아니니까 마구마구 남발하셔도 된다하고 감사하다는 단어는 잊지않고 일러주었다 투어의 성공여부는 가이드 와 현지 전용 버스차량의 기사와 팀웍도 무시 할수없다는 사실이다 마필두
고등학교 때 일이다 반항 아닌 반항으로 난 남들이 하지 않는 거치른 반항을 하였다. 중학교 때까지는 제법 공부도 잘하고 그랬던 나 였지만 고등학교 1학년 성적은 500명중 450등 이쪽 저쪽 그것도 반항의 등수이다 선생님이 미웠고 친구들이 좋았고 그렇지만 안하는 것 하나 수업시간에는 졸지는 않았다. 고1학년 1년의 시간을 소설로 쓰면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 될 것이다 담탱이의 스파이 학생을 잡은 추억 그로인하여 그 학생은 우리에게 배반자의 낙인이 찍혀 고등학교를 기를펴고 다니지 못했다 또 담탱이 때문에 3주의 가출 그로 인하여 집 뿐 아니라 학교도 난리가 났던 기억 정의 실현이라고 무조건 선생님이 옳은 것 만은 아니라는 사상을 가진 나는 선생님과 언쟁을 높이기도 하며 내 의견을 거침없이 펼치기도 한 되바라진 학생 이였다 참 버라이틱 한 고1을 지냈다 정말 청개구리가 따로 없을 정도로 그리 지낸 그 시간 1교시가 끝나면 교실에 입성하고 15분 걸어서 학교 갈수 있는 거리에 집이 있는데 1시간 차를 타고 다녀야하는 이모집에서 다닌다고 고집을 피우고 지금 생각해도 나처럼 말 안듣는 딸이 또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고집의 시간을 뒤로하고 늦가을부터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정상적인 학생 그리고 학생다운 학생의 모습으로 거듭 나기 위해 나 자신을 뒤돌아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이 모든게 다 아버지 때문에 시작되었다. 나에게는 더욱 각별한 아버지가 건강이 안좋아 지셔서 아버지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부를 하였고 착한딸로 얌전히 생활하였다 그로 인한 후유증은 있었지만... 450등정도의 나의 성적이 2학년 3월말고사에서 전교 11등 그로 인하여 난 학생들사이에 컨닝에 귀재인 아이로 재 탄생되어 있었고 교장실까지 불려가 선생님들의 닦달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난 결단코 컨닝을하지 않았다. 몇 선생님은 나의 성격을 아시기에 OO는 절대로 컨닝할 아이가 아니라고 대변도 하여주셨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난 ‘다음달 성적보고 이야기하시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교실로 돌아왔지만 한달동안 난 컨닝의 귀재인 아이로 등극되어 있는 상황 아이들 사이에서는 신의 존재로 낙인찍혀 있었다. 다음달이 되었다 난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시험보는 방식은 다른아이들과 달랐다. 남자선생님 휴게실에서 혼자 1인감독하에 시험을 보았다. 정말 화가 많이 났다. 3일후 성적이 나왔다. 담임선생님이 굳은얼굴로 성적표를 주셔서 순간 당황하였다. 전교 6등 선생님이 똑똑히 이야기 하여주셨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난 순간 눈물이 흘러 나왔다. 흥분을 가라않히고 난 뒤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있는 상황이다. 성적이 나오면 난 결백하니 하고싶은데로 한다고 허락받은상황 교장실로 달려가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선생님들에게 내 성적표를 내 던지고 싶었다.그래서 교장실로 달려갔다. 이미 교장실에는 선생님들이 와 계셨고 미안하다는 사과와 ‘OO이 정신차렸네’라는 말과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난 아이들 앞에서 나의 오명을 풀어달라고 이야기했다. 교장선생님은 흥쾌히 승낙하셨고 난 컨닝의 귀재가 아닌 학교의 전설이 되었다. 내신등급 15등급기준에 13등급이였던 나였는데 내신4등급으로 대학가는데 별 문제 없이 되어졌다. 그 모든 것이 고1학년 부족했던 공부, 잘 모르는 공부를 친구들에게 물어보며 습득해 나간덕분이다. 내 책상에는 한번수치는 영원한 이익이다 라고 크게 적어놓았다. 그게 나에게는 큰 힘이 되는 글귀였고 나로하여금 창피라는 단어를 던질수있는 글귀였다. 보무라지
1. 친절을 파는 직업  /   雲 率 : 朴 昶 坤 (1) 택시운전면허 시험합격  용띠의 띠 동갑내기로 오랫동안 회사의 부하직원과 친형제처럼 생활했던 아우가 새삼스럽게 전화가 왔다. 그 아우를 거풍[擧風]이라 부르는데, 요즘 왕십리 근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며,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하여 거풍[擧風]을 만나러 가는 길에 지난해 춘범이 만날 때 일들이 생각이나, "왕십리하고 나하고는 인연이 깊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영사기의 필름처럼 머릿속에 흐른다.춘범이는 외국인 설계회사에서 대형 프로젝트설계 팀장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하고 영업용택시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 춘범이는 흉허물 없이 세상사 이야기를 함께하는 소중한 친구다. IMF 이전에는 춘범이와 힘께 잘 나가던 연구소에도 근무했었고, 일류 건설 회사를 두루 거치면서 외국 건설현장에서 젊음을 과시했었다. 작년 이맘 때,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오후 춘범이가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돈암동에 차를 두고 왕십리역에서 춘범이를 만나 살아가는 근황을 자세히 캐물었었다.나 역시 대학교 산학연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었지만, 업체들이 신통치 않았고 집에서 이곳저곳 분주히 일자리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춘범이는 나에게 "왕기야 너 운전 아주 잘하지, 내가 택시를 몰아보니까 제일 좋은 직업이더라, 손님이 가자는 데로 가면 되거든, 너도 영업용택시 면허를 따고 나랑 같이 택시나 몰고 다니자." 춘범이는 택시운전회사 근무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솔깃해 귀를 기울이며, 택시 운전 자격에 대하여 간략하게 메모를 해가며 들었다. ‘그래 춘범이가 하는데, 내가 왜 못하겠나.’속으로 택시운전사로 취업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1종 면허소지자로서 운전경력 1년 이상, 나이는 21세 이상, 내 나이 65세, 나이가 너무 많나하는 생각도 들었다."그래 면허시험은 어디서 보는데.""교통회관이다""정말 시험을 한번 봐라 "춘범이는 나를 자기 내 회사에 취업시켜 주겠다고 회사 자랑까지 했다.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잠실역에서 내리면 교통회관이 가깝다나, 나는 속으로 웃으며, …………."춘범이는 참 고마운 친구야! 그래 내가 내일 시험 접수하마. "마주앉은 탁자 위 숯불에는 곱창이 노릇노릇 먹음직스럽게 익어가고 춘범이와 세상사는 이야기에 밤은 깊어만 갔다. 다음날 나는 차를 몰고 교통회관 1층에 접수를 하고 며칠이 지나서 시험에 응시하여 영광의 택시 운전면허 자격증을 손에 검어 쥘 수 가 있었다.  (2). 최고의 모범기사가 되리라.  춘범아 ! "나 택시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어," "너희 회사에는 취업할 수 있는 거야 ?" 어제는 좋아라, 제일 먼저 춘범이에게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정장차림으로 깔끔하게 모양을 내고, 내일 오전 9시까지 회사로 나와 면접을 보라고 한다. 춘범이가 시키는 대로 택시회사에서 면접을 보고 최종 사장님의 인성교육을 마치면 취업이 확정된다고 했다.희끗희끗한 머리를 단정히 하고, 젊어 보이도록 염색까지 했다. 구두도 윤이 나게 닦았다. 새신랑 장가갈 때처럼 맵시를 냈다. 총무과 직원을 따라 사장실로 안내되었다. 사장님이 들어오시더니 내 모습을 힐끔 보시고는 맞은편에 앉으시며, 서류에 붙어 있는 이력서를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대기업 중견 간부로 오래 근무하셨군요. 그 연세에 힘든 운전을 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 회사 경영방침은요” 기사는 승객의 만족을 위해 최선의 서비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승객이 편안히 목적지까지 탈 수 있는 택시가 되어야 하고, 작은 감동이라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언제나 기분 좋은 택시가 되어야 합니다.  “기사는 친절이라는 상품을 파는 직업입니다.” 무조건 누가 강요를 해서도 아니 되고 기사 스스로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 취지를 알았으니까, 총무과에 가서 근무 할 수 있도록 입사 수속을 마치세요.사장은 손을 내밀며 나의 손을 잡고는 “우리 회사 입사를 축하드립니다."” "예 사장님, 감사 합니다. 모범운전기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장실을 나오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최선의 삶을 노력 해 보겠다고 ………….총무과에서는 내 체격에 맞는 회사마크가 달린 M 사이즈의 남색 정장과 코팅된 사원증을 주었다. 탈의실에서 근무복으로 깔끔하게 갈아입고 교대할 근무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친구 춘범이는 근무를 다 마치고 들어왔다. "축하한다. 열심히 해봐 임마," "춘범아 ! 고맙다 ."   나와 교대할 차종은 뉴 소나타 신형으로 택시의 내, 외부가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기분이 상쾌했다. 이렇게 깨끗하면 서로 기분이 좋은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매너와 교양을 겸비한 내 마음에 우러나는 서비스정신으로 손님을 맞이하겠다고, 사장은 친절이 상품이라고 했지. 이제 친절을 팔려고 택시를 몰고 나가는 거야. 춘범이가 알려준 인사말을 상기하며 택시 안에서 혼자 중얼거렸다."어서 오세요 손님 안전택시 입니다.""어디로 모실까?""00으로" "손님이 가시는 곳은 xxx 방법과 ooo방법이 있지요.""손님은 전에 어떻게 가셨나요."xxx ........ oooo ........."예 알았습니다. 손님 말씀하신대로 모시겠습니다."" 미터기를 누르겠습니다." (할증을 누르겠습니다.)목적지까지 다 와서 손님이 내릴 때 “놓고 내리시는 물건이 없으신가. 주위를 확인하시고 내리세요.”"000원 나왔습니다.""잔돈 00원입니다.""좋은 하루 되십시오 감사 합니다."새로운 마음으로 영업용택시 뉴 소나타의 운전석에서 시동을 걸고 환하게 웃어주는 춘범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회사 정문을 나와 차량이 질주하는 도로를 나왔다 지금부터 친절이라는 상품을 팔아야 한다. 소양교육 받을 때, 나에게 준 다이어리에는 아래의 글이 적혀 있었다."말 한마디가 당신입니다.좋은 말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말을 하면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말 한마디가 당신의 생활입니다.험한 말을 하는 생활은 험할 수밖에 없고고운 말을 하는 생활은 고와집니다.  말 한마디가 당신의 이웃입니다.친절한 말을 하면 모두 친절한 이웃이 되고거친 말을 하면 거북한 관계가 됩니다.  말 한마디가 당신의 미래입니다.긍정적인 말을 하면 아름다운 소망을 이루지만,부정적인 말을 하면 실패만 되풀이 됩니다.말 한마디에 이제 당신이 달라집니다.예의바르며 겸손한 말은 존경을 받습니다.진실하며 자신 있는 말은 신뢰를 받습니다."   (3). 잊을 수 없는 악연이었다. 누구나 인연을 상당히 중요시하며, 그 인연으로 맺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닌가?삶이란, 만나고 헤어지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또 헤어지며, 새로이 만나는 수많은 인연이 있다. 옷깃을 스치며 길거리에서 만나는 인연, 학교에서 만나는 인연, 고향이나 지역에 만나는 인연, 직장, 종교, 군대 등의 인연을 생각하며, 오늘은 정릉까지 가는 젊은 부부를 뒷좌석에 태우고 조용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수 이선희의 "인연"을 듣는 순간, 맑은 목소리에 40년 넘게 가슴깊이 묻어두었던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희미한 첫사랑 여인, 수박색 남방을 처음 선물로 받은 기억이 떠오른다. 나보다 2살 아래인 신영이가 떠오른다. 통통한 몸매였지만 마음만은 비단결 같았지, 예순의 나이에도 신영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뒷좌석에 타고 있는 젊은 부부를 백미러로 힐끔 힐끔 쳐다보며, 창가로 파고드는 가로수 등불이 뒷좌석을 훤히 볼 수가 있었다. 몸을 껴안고 키스의 신음소리가 간혹 들려왔다. 차를 서서히 세우며 "손님, 정릉 입구입니다." 그때서야 밀착했던 몸을 똑바로 하며, 택시요금을 내더니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빈 택시로 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지났다. 거리에는 드물게 몇 몇 사람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고 나만의 한가한 시간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고, 불가에서 한 말은 인연을 중히 여기며 귀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라고 생각해 본다. 수많은 行人이 전철역이나 대중이 많은 곳에서 옷소매나 팔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런 인연이 아니라 옷깃이란 목 주위를 둘러싼 부분이다. 이곳을 서로 스친다면 보통 인연이 아님이 틀림없다. 나와 얼마나 깊고 깊은 인연인가? 무료하게 정류장에 택시를 정차해놓고, 손님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점퍼차림의 날렵한 모습의 한 젊은이가 다가왔다."문산 역에 갑시다." "손님, 문산 역은 미터 요금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5만 원은 주셔야 합니다.""4만 원에 가시지요""나올 때 빈 택시로 나와야 합니다. 손님! " 그러나 잠시 생각하다가, "손님 타시지요."손님이 뜸한 시간이라 교대시간까지 회사 입금할 돈을 벌려면 손님을 놓칠 수가 없었다. 정릉입구에서 문산 역으로 손님을 모시고 가는 도중 느낌이 좀 이상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10여분 쯤 왔을 때였다. 손님은 나에게 담배가 있는지 물었고, 나는 담배를 끊어서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지나가는 길목에 매점이 있으면 담배를 사다 달라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손님이 왕이라는 고객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조금 불친절하게 손님에게 대하면 노동의 스트레스가 적어지고, 친절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노동의 스트레스가 증가한다면 운전가사를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손님은 담배를 피워 물더니 나를 보고 "자정이 지났으니 돈 많이 벌었겠네요." "아니요 요즘은 손님이 없어 회사 입금할 돈을 벌기 힘들지요" 마음속으로 강도로 돌변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문산 역 앞에 도착하여 안심하는 순간 ! "기사 님! 돈이 없어요. 나 그냥 내립니다."이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 나는 순간 문을 자동 잠금 장치로 변환시키고, 긴급히 비상라이트를 켜며. 역전 파출소로 달려갔다. 택시 안에서는 나에게 험한 욕설과 가만두지 않겠다고 아우성이다. 파출소에 들어서자, 경찰관이 택시를 이용했으면 기사에게 요금을 지급하라고 호통을 쳤다. 정릉에서 문산 역에 오는 도중 담배까지 사다 바치면서 손님을 정중히 모신 것이 약이 올랐다. 경찰관이 나를 부르더니, "기사 양반 저놈 주민등록을 전산 조회했더니 전국지명수배자요" "그리고 전과가 8범이군요. 무사히 여기까지 오신 것이 천만다행이요.""이놈에게 돈 받을 생각하지 마시고, 다른 손님이나 태워 가시는 것이 좋을 거요" “지명 수배자를 파출서 까지 잡아와 고맙군요. 허탈한 마음으로 택시를 몰고 서울로 향했다.   나에게는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요즘 천태만상의 손님들 행동을 떠올려본다. 택시기사를 인격적으로 무시했던 여인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지난 7월의 무더운 오후였다. 세련되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인이 택시 뒷좌석으로 오르며, “천호동에 있는 00 슈퍼,” “예 천호동은 아는데, 00 슈퍼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시다가 길을 좀 알려 주십시오“ 정중하게 말을 했다. 그러나 이 중년의 여인은 퉁명스럽게 “길도 모르면서 택시기사는 왜 해” 반말을 하는 여인이 밉기는 했지만, “예 제가 택시회사에 취직 한지가 얼마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억지로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그러자 그 중년의 여인은 “길도 모르면서 택시 그만해” 무더운 여름 날씨에 참으려고 했다. 그러나 “택시 그만해” 하는 소리에 100여 미터를 가다가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우고 “손님 아무리 택시기사를 하더라도 어떻게 반말만 하십니까? 제 나이가 60이 넘었습니다. 길을 모른다고 하시니 다른 택시를 이용하시지요.” 중년의 여인은 택시에서 내리지도 않고, “승차 거부야, 맛을 좀 봐야겠어,” 하더니 휴대전화기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응, 자가야? 난 데, 택시기사 새끼가 승차 거부하네! 나보고 내리래, 응, 어디로 오라고? 천호동 지나 농협으로? 알았어.” 화가 났지만 농협근처에 도착해서 그 여인의 남편에게 멱살을 잡히는 수모를 당해야 했고, 경찰이 오고 나서야, 택시요금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인연치고는 치고는 다시 만나지 말아야 하는 악연으로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아닌가 싶다.      (4). 소중한 인연이다  저마다 목적지를 향하여 미아리고개를 주행하는 차량들 속에 나 자신도 합류했다. 뒤따라오던 승용차 하나가 묘기를 부리듯 요리조리 자동차 사이를 자랑스럽게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면허시험장 감독관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도로를 달리는 영업용 택시를 보고 운전기사의 인격이 거리를 주행한다."라고 했다. 운전기사의 인격은 택시를 어떻게 운전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손님과 택시기사와의 만남은 잠깐 스쳐지나 가는 바람과 같은 인연일 지라도, 항상 손님을 맞이할 때, 첫인상과 웃는 얼굴로 "어서 오십시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친절을 파는, 운전기사라는 나의 직업은 이제 생활신조로 생각한다. 손님의 취향에 따라 이야기 화제를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며, 목적지까지 대화를 즐겁게 나눈다. 이럴 때 손님과 나의 바람 같은 인연이라 할지라도 그날의 기분이 좋지 않을까?   며칠 전 경동시장에서 손님을 태우고 인천 화물터미널에 갔다가 하루 종일 기다리며, 돈 한 푼 받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항상 그랬듯이 오늘은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어제 손님과 대화한 이야기가 또 생각난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택시기사라는 직업이 참 재미있는 직업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지요.""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앞에 운전하는 사람이 빤히 백미러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벽이라도 쳐놓은 양 자기들끼리 할 말, 못할 말다하고," 나는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쳐주었다."그것도 그렇고, 못 볼 것도 참 많아요. 처녀총각들이 뒤에 타 가지고는 별짓들을 다해요. 막 키스하고 몸을 끌어안고는,'쪽, 쪽 '대고, '아아~~' 신음앓는 소리 내는데 정말 열 받아요." "아, 그건 좀 심하네요.""차마 '조용히 합시다."라는 소리도 못하고, 못 들은 척 그냥 운전만 하는데, 정말 별꼴들도 많죠.""기사님은 보고 그냥 두세요."" 예, 자기네 안방으로 생각하나 봐요. 시비를 붙었다가는 경찰서까지 가야 하니까요""기사님! 간혹 가다가 이상한 유혹을 하는 여자들이 타는 경우도 있지요""아! 그런 경우도 있어요?""종종 있어요, 보통40대" 마음속으로 어제 손님과 대화를 떠올리며, 미아리 고개에서 손님을 태우고 화곡동까지 왔다. 오전 10시 출근시간이 지나서 거리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빈 택시로 손님을 찾아 김포공항 방향으로 서행하고 있는데, 앞에 보이는 조그마한 호텔 대로변에는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70대 노인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는 손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손님 옆에 택시를 세우고, 내려서 정중하게, "손님 어서 오십시오" 얼른 가방을 받아 뒷좌석에 실어 드렸다."손님 어디로 모실까요?""인천국제공항으로 가시지요.""예, 손님.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70대 노인신사는 기분이 좋은 듯이 말을 건넨다."기사 양반 같이 모든 운전기사가 친절했으면 좋겠구려!" "예, 요즘은 다 친절합니다. 손님!"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를 들어서며 장거리 손님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지만, 칭찬까지 들으니 마음이 상쾌해진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노신사는,"기사님, 택시운전은 얼마나 했소?" "네, 6개월 조금 넘었습니다. 경험은 없습니다만, 손님이 제 차에 오르시면 최대한 안전하고 기분 좋게 모시려고 노력합니다.""기사님은 택시운전을 하기 전에 무슨 일을 하였소.""네, 대전 근교에 있는 00대학교 내 창업보육센터에서 기계부품 개발 사업을 하였습니다." 노신사의 손님은 흥미로운 듯 나의 지난 과거를 묻기 시작했다.  “네~에 대전 근교의 00대학교내 창업 센터에서 기계부품 개발 사업을 하였습니다. 손님은 흥미가지고 지난 과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이야기 가운데, 경북구미00전자기술연구소 있을 당시를 자세하게 물으면서, 연구소 근무경력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서울00기술연구소와 전자기술연구소, 모다 정보통신의 부 사장 겸 연구소부소장까지 10여년의 경력이 된다고 하니, 노인은 매우 안타까워하며, “훌륭한 인재가 이렇게 고생을 많이 하시는 구려” 하면서 이것저것 면접관처럼 물었다노신사인 손님은 나를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시며, "훌륭한 인재가 택시운전기사로 고생이 많으시구려!"관심 깊게 들어주시는 노신사 손님에게 미국에서의 생활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모스크바, 등 까지도 덧붙여 말해 주었다.노신사 손님은 "나는 대구에서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운영합니다, 그리고 기업부설연구소가 있는데, 조직이 좀 미흡합니다.""기사 같은 분이 우리 연구소에 근무했으면 좋겠소." "내가 일본을 가는 중인데, 3일 후면 돌아옵니다." 그 노신사 손님은 명함을 주며, 대구에 있는 회사에 근무하실 마음이 있으면, 3일 후 통화를 하자고 한다."손님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택시대기 장소에 차를 세우고 명함을 유심히 보았다. 직함이 00회사의 회장이었다. 회사에 근무할 마음이 있으면, 3일 후 전화를, 그 노신사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나를 보고 훌륭한 인재라고...마음속으로 중얼 거리며, 기분은 꿈속에서 헤매는 느낌이었다. 택시대기 장소에서 손님이 다가와 방학동으로 가자고 하는 말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다시 손님을 태웠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인가 보다. 새로 모신 손님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택시기사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다"라며 예찬론이 대단했다. 40년간 금융업계에 몸담고 최고경영자(CEO)까지 올랐으나 돌연 사표를 내고 택시기사로 전업해 방송에 화제가 됐던 62세인 김기선씨 이야기였다. 잘 나가던 금융회사의 사장 임기를 1년 남겨두고 갑자기 사표를 내고, 택시기사로 전업한 이유는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은 늙으면 뒷방으로 물러앉고, 의사도 나이 들면 손 떨려서 수술을 못한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택시 운전이라고 말했단다.   김씨는 "40년 금융회사 생활보다 4년간 택시기사 생활에서 더 큰 교훈을 얻었다"며"이렇게 힘든 일을 하면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 더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40년 동안 금융기관에서 편안하게 생활했는데 그것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4년 동안 택시 운전하며 인생 공부와, 서민들과의 인간관계에서 배운 게 훨씬 많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손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3일 후 노신사에게 전화를 할까? 아니면 잊어버리고 택시운전을 계속할까?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방학동에서 손님은 내리고 교대시간이 임박하여 차고로 향했다. 오늘의 수입은 택시회사에 입금을 하고 6만 원을 내 손에 쥘 수가 있었다.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부르며, 집 앞 슈퍼에서 커다란 수박 한 통 사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아내에게 오전에 받았던 황 회장의 명함을 내밀었다."3일 후에 이력서를 준비해서 자기회사로 연락하라. 하더군!"“회사가 어디야?”"대구에 00회사, 기업체 부설 연구소래."“대구까지 어떻게 내려가노, 택시나 하지 그 나이에 무슨 취직을.”아내는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그래, 이 나이에 무슨 취직을 서울도 아니고 대구까지 가서...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아내의 말에 마음을 접을까 싶었다.  황 회장이 명함을 주며 전화하라는 3일이 되는 날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택시정류장에 대기해 있으며, 다이얼을 눌렸다."여보세요 거기가 00회사입니까? 황 회장님 계신가요.""네, 계십니다만, 어디 신가요."상냥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울입니다. 며칠 전 황 회장님이 일본 가실 때 서울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택시로 모셨던 택시기사인데, 전화하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잠시만 기다리십시오."잠시 후 황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매우 반가워하며, "우리 회사 연구소에 근무하실 마음이 있습니까?""예, 조건만 맞으면, 제 인생에 마지막 직장이라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다 하겠습니다." "그러시면, 내가 우리 회사 중역들과 협의를 해야 하는데, 우선 이력서를 Fax로 보내 주시요."" 예, 알겠습니다."  황 회장의 인품과 정중한 표정을 떠올리며, 자필 이력서를 정성껏 쓰고 사진을 붙였다. 다음날 오후 휴대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여보세요" 황 회장께서 직접전화를 했다. 시간을 언제쯤 낼 수 있는가를 묻는다. 택시회사 교대근무관계로 이틀 후로 약속을 했다.  서울역에서 대구행 KTX 열차에 몸을 싣고 창 밖에 싱그러운 여름을 만끽하며,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고속열차만큼이나 내 인생이 빨리 지나갔음을 아쉬워하는데, 대구역이라는 안내 방송 멘트가 울린다.대구 00공단의 회사는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보였다. 오전11시 황 회장을 찾았다.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회장실에 들어서며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잠시 후 회의실에서 황 회장, 전무이사, 관리담당이사, 연구소 소장과 면접을 보았다.근무조건은 3개월 수습기간이 주어졌고, 원룸의 숙소제공과 출, 퇴근, 업무용승용차,그리고 주말마다 서울 왕복 고속열차요금지원, 나의 직함은 기업부설 연구소 이사 겸 부 소장이란 직책이었다. 영업용 택시운전기사의 친절함과 정중한 예의바른 생활이 60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인연을 만나 활기찬 인생길을 찾았다.   운솔
카카오스토리에 4년전 오늘 이라고 글이 떴다. 무슨 내용인가하니 웨딩촬영을 했던날이란다. 내가 남편에게 카톡으르 보내니 이렇게 왔다ㅋㅋㅋㅋ 진짜 돌아가시게 할까하다..참았다. 지금은 돌쟁이 딸래미도 하나있어서 세식구가 되어 살고있다. 참 시간이 빠르다. 난 사실 성격이 둥글둥글하다. 남편에게 크게 바라는것도없고 워낙 큰소리내는걸 싫어해서 싸운적도 별루없다 주변에선 나보고 너무 착하다며 남편을 너무 봐주고있다고한다. 본인들같으면 벌써 몇번은 친정가고 치고박고싸웠다고... 남편역시 회사동료들 아내들을 보면 내가 너무 착하단다. 아마 잔소리를 잘 안한다는 뜻인듯. 음..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못되져야하나.. 근데 나도 내가 왜그러나 생각해보니. 우선순위가 많이 바뀐것같다. 둘이살때는 남편이 내 삶의 반이였다면 이제는 아이가 내 삶의 3분의 2를 차지하는것 같다. 둘이 있을땐 늦게오고 하면 잠도못자고 기다리고 걱정하고했는데...ㅎ 지금은 후딱 애 씻기고 일찍재우고 티비보거나 나도 일찍 잔다 그러니 착하다기보다는.. 조금 덜 신경쓰게되서 그런듯하다. 가끔 남편은 주말에 커피한잔하고오라고 시간을 준다. 그 시간이 참 감사하다 겨우 2시간정도지만말이다. 지금도 커피한잔하며 문뜩 남편에게 고마와 글을 남겨본다. 독박육아. 때론 너무 힘들기도하다. 얼마전 티비에서 결혼과 출산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하는걸보았다. 아이를 낳으니, 결혼하고 출산한걸 절대 후회할수가 없다.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이렇게 내 앞에서 엉덩이 흔들며 춤추는 귀여운딸래미는 없었을테니까. 앞으로 어떤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배려하며 잘먹고 잘살자. 웨딩촬영때.. 참 화장의 힘이 대단했구만ㅎㅎ 초롱목장
손골마을 향기로운 풀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의 손곡(蓀谷)에서 유래했다는데 내게는 오히려 고요가 흐르는 골짜기,정곡(靜谷)이 더 맞는 말인듯 싶다 십자가의 길 14처가 모셔져 있는 손골성지 뒤안길, 광교산 토끼재와 시루봉으로 오르는 샛길 등산로가 있어 종종 등산객들이 찾지만 다른 길에 비해 찾는 이가 많지 않고 인근에 성당과 성지가 있어서인지 차분하고 조용한 공기가 흐르는 곳이다 계곡을 따라 조금 오르면 빽빽한 송림이 우거져 있는데 적당한 빛과 그늘이 드리워진 나무둥치 아래 앉아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기에도 사색을 즐기기 위해도 좋은 곳, 손골마을에서 성지로 들어서는 길 한곁에 노랗게 핀 황매화가 눈에 띤다 겹으로 된 죽단화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황매화는 참 오랜만이다 강물처럼 봄이 흐르는 자리, 하얗게 빛이 바랜 꽃잎이 다른 꽃잎들 보다 더 빛나고 있었고 다 진 후엔 아름다운 별이 돼 있더라,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골성지 길, 어둑한 골목마냥 모감주 나무 그늘이 내려앉은 돌담길을 지나면 천주님 동상이 나오는데 굳게 깍지낀 손으로 항상 같은 기도를 드린다 ‘천주님, 저희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게 지켜주세요!’ 천주님께서 무신론자인 내 기도를 들어주실거라는 생각은 않지만 주일마다 성당에 나가시는 어머니를 봐서라도 내치지는 않으실 것 같아서 말이다 천주님 동상을 지나면 나오는 십자가의 길, 길 초입에 꽃말이 '조용'인 백합나무 잎들이 싱그럽게 돋아나기 시작한다 나무 한그루가 백마디 말보다 더 큰 무게를 느끼게 한다 십자가의 길을 지나 등산로에 접어드니 그새 줄딸기가 군락을 이뤄 만발해 가고 아기처럼 목을 가누지 못하던 풀솜대도 제법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송림 그루터기에 앉아 김밥과 커피로 마음에 점 하나 찍고 다시 샛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날개를 활짝 펴기 시작한 병꽃나무가 보이고 길가 바위에 핀 매화말발도리도 조금씩 눈에 띤다 사진 몇장을 담고서 다시 내려오는 길, 지난번 벚꽃이파리 지던 자리, 근황이 궁금해 찾아간다 계곡가엔 올라올때는 미처 못 봤던 귀룽나무 꽃이 여린 가지와 잎사귀와 함께 바람을 흉내내며 휘날린다 이젠 바람꽃들은 졌을 시기지만 귀룽나무를 보면 왠지 바람이 떠오른다 미세한 바람에도 섬세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마치 바람의 결이 무늬로 새겨져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니들은 바람의 표정을 봤을 수도 있겠구나 어디선가 피었다 무심히 지는 그 속내를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귀룽나무 아래 계곡, 내려놓는 일이 마음 편해진듯 조용히 벚꽃이파리를 떨구던 자리엔 이미 그때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남은 흔적마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매년 봄은 다시 오겠지만 봄날은 그리 많지 않아!…” 그 모습이 남은 봄날을 내게 묻는다 그림인
팔월의 더위는 맨몸으로 물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게 한다. 전국이 피서 나들이로 7번 국도는 거의 매일 꽉꽉 막힌다. 우리 가족도 피서나 다녀오면 좋으련만 피서는 언감생신 밭에서 익어가는 고추를 따러 나서야 한다. 빨갛게 익은 고추는 우리 가족 피서는 안중에도 없다. 농약과 화학 비료 한 방울도 사용하지 않은 고추는 내 무릎 아래 에서 찰랑인다. 고추 수확량은 남들의 십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나마 올해는 비가 많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수확을 할 수 있다. 어느 해는 첫물 따고 나서는 고추가 전부 탄저병이 들어서 고추잎만 수확해서 고객들에게 보내준 적도 있었다. 내 몸에 농약 묻히기 싫어서 짓는 농사이기에 하늘이 주는 대로 감사하며 받아야 하지만 늘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매실밭에서 급히 서둘러 나오다가 비탈진 언덕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괜찮겠지 생각하고 일손이 바빠 약국이나 병원 가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과수원에는 사과들이 나날이 내 손만 부르고 날마다 택배 또한 내 몫의 일거리였다. 넘어진 며칠 후 걸음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릎이 아파서 남편과 병원을 갔다. 의사는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오늘 보낼 택배만 싸놓고 다시 온다고 하니 의사가 호통을 쳤다. “택배는 내일 보내도 되지만 그 몸으로 지체하여 덧나면 치료를 못 하니 알아서 하시오.” 단호한 의사의 한 마디가 차가운 냉수를 끼얹는 듯했다. 물론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의 마음은 이해가 되었지만, 환자의 상황을 헤아려 주지 않는 병원을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걸을 수 없는 형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벽부터 나날이 농장과 밭을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던 나는 고삐 묶인 송아지가 되었다. 다리를 천정에 매달아 놓고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는 신세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꼴이었다. 막내는 학교를 마치면 병원 셔틀버스를 타고 와서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고 퇴근 시간이 되면 아빠와 함께 집으로 갔다. 노트북 컴퓨터라도 있으면 블로그에 글이라도 올리련만 그 당시 폴더폰 하나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입원은 책을 한 권 읽을 수도 없었고 글을 쓸 여유도 주지 않았다. 농사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종일 푹 자고 싶은 소원도 이루지 못했다. 병원 침대에서도 집에 있을 아이들 반찬 걱정, 밭에 있는 농작물 걱정만 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 내가 너무 바쁘게 움직이니 하나님이 쉬어라고 잠시 쉬는 시간을 주셨구나. 믿지도 않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럭저럭 일주일 후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막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다리를 다친 엄마를 돕는다고 휴가를 받아 집으로 온 큰 아이와 온 식구가 고추밭으로 향했다. 아직 성치 않은 한쪽 다리는 굽히지 못하고 쭉 펴고 앉아서 고추 따기를 시작했다. 고추를 한참 따던 막내가 둘째에게 말한다. “ 어 ! 언니 이 고추 참 맛있다 언니도 먹어봐! 역시 우리 아빠가 유기농 농사를 지으니 참 좋다 말이야 ” “ 아! 맛있다 으음 냠냠냠 ” “ 야 고추가 맵지 왜 안 맵니? ” 철이 든 둘째는 막내의 말을 믿지 않는다. “ 응, 혼자나 많이 먹어셔, 고추를 따러 왔으면 고추나 딸 것이지.” 하면서 꿈쩍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추를 딴다. “ 아니야 언니야 진짜 안 맵고 맛있다. ” 약이 오르지 않은 고추는 상큼하고 맨입에도 먹을 만하다 “ 알았어 너나 많이 먹어.”   고추를 따면서도 속으로 ‘이상하다. 김치도 맵다는 녀석인데 … ’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아니나 다를까 “어~ 아 잇 매워 매워 으 응응응 앙앙 ~~ ” 급기야 울음이 터진다 남편은 “선예야 차에 있는 물 먹어라” 다급하게 외친다. 온 동네 떠나갈 듯 울면서 차에 있는 물을 가지러 달려가는 순간은 내가 정신이 잃을 지경이었다. 물을 먹는다고 입안의 매운맛은 빨리 가시지를 않았다. 설탕이나 사탕처럼 단것을 먹으면 제일 효과가 빠르다. 늘 사탕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남편이 밭에 자라고 있던 수세미를 냉큼 하나 따 가지고 수세미의 수액을 선예에게 먹었다. 잠시 후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으로 수세미를 먹고 있는 막내를 보고 첫째와 둘째는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막내는 언니들 따라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던 그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차례 소동이 끝나고 또다시 작업이 시작되었다. 고추는 한꺼번에 다 따서 세척해서 건조실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막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언니야 여기 고추밭은 수영장이고 이 컨테이너 박스는 튜브다.” “ 나는 튜브 타고 고추 딴다. ~~” 초등학교 3학년의 상상력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힘든 고추밭에서 매운 고추를 먹고도 고추밭을 수영장으로 만드는 아이. 고추를 따서 담는 컨테이너 박스는 말 한마디로 마술처럼 튜브가 될 수 있었다. 더운 여름 수영장이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고추밭이 수영장이 되었을까? 고추 따기를 그만두고 가까운 바닷가라도 가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이 아려온다. 시원하게 달릴 7번 국도는 차량정체로 답답하고 매운 고추밭에 앉아 더위를 견디며 고추 수확을 하는 아이들이 마음이 붉게 익어가는 고추만큼이나 알싸하고 매운 맛이다. 매콤한 고추가 여름에 집나간 입맛을 돌아오게 하듯이, 우리 아이들이 내게는 최고의 보약이다. 냉수에 밥 말아서 아삭한 고추 하나를 집어 들고 와작 씹는다. 한여름 더위가 입 속으로 사라진다. 생각만으로도 시원하다. 자연의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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