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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추천스토리

누런 상자 안에 너를 담아서 데려 온 날 기억나니? 부들 부들 떨면서 마치 날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하듯 너가 갖고 태어 난 커다란 눈망울은 공포가 담겨져 있고 난 부서질것 만 같은 300그램정도 됬던가? 그런 너를 조심 스럽게 안고 내 심장소리를 들려주었단다 얘야. 널 어떻게 하려는게 아니란다 안심 하거라. 너의 어미는 아니지만 내 심장소리 듣고 이제 내가 너 보호자가 되주께 그리고 너와 나의 동거가 13년을 이어 갔네 나는 진심으로 너에게 위로를 많이 받았구나 혼자가 아니고 늘 내곁에서 나의 흐느끼는 울음 소리에 반응 해주고 다가와서 핧아 주던 너 말도 못나누는 의사불통 인간 과 개 사이 였지만 우린 나누며 살았지 난 집에 돌아 오면 반갑다고 뺑뺑돌면서 오줌을 싸는 너가 밉지가 않았단다 너를 데리고 자다 깨보면 침대에 강아지전용 계단이라도 장만 해줄것을 무지한 견주다 보니 넌 못참아서 응가를 싸놓고 난 자느라 모르고 그위로 뭉게고 자다 일어나서 알고는 난리동갑 였지만 그덕에 빨래가 산더미 같이 쌓였지만 그래도 난 너가 이뻐서 죽을것만 같았단다 금지옥엽 개한테 써도 안아까운 말 우리 코코 헤어지는 순간이 갑자기 다가오더구나 난 출장을 나가면 집에 있는 할아버지 보다 너가 더 보고 싶었단다 할아버지도 너도 없는 지금 이런 말이 무슨 소용 있겠냐만서도 차츰 너의 수명이 다할 나이에 다가오니까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난 언니랑 밤낮 열심히 병원을 데려갔단다 하지만 마지막 고통속에도 목소리가 안나오던 너가 내가 링거를 맞혀놓고 집에 갔다 온사이에 우렁차게 짖었다며 수의사가 마지막 소리낸거 같다고 오늘 못넘긴다고 했을때 난 가슴이 철렁거리고 안되! 살려야지 하면서 매달렸지만 방법이 더는 없다는 너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 서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너의 입에 꿀물을 묻혀주고 애를 썻지만 넌 그날 밤 내품에서 가더구나 서서히 식어가는 너를 옆에 두고 날밤을 새면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잘가라고 하면서 너를 곱게 보내고 난 우울증에 빠졌단다 내안에 너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서 자보지만 안나타나더구나 코코야 그뒤로 언니가 엄마걱정 하는 바람에 2대치와와가 입성했는데 난 별로 안예뻤단다 지금 6살됬는데 엄마 지금 부터 걱정이야 이별의 순간을 어떻게 또 맞나 안예뻤던것이 요즘 엄청 이쁘구나 미안. 배신을 한건 아니고 너의 종족이 그렇게 매력적인걸 나를 홀려논거지모 코코야 왜 이름이 코코인줄 아니? 언니가 샤넬 브랜드 좋아하다 코코샤넬 앞글자를 딴거란다 요녀석이 2대 치코 코코 동생이니까 치코로 하라고 할아버지가 명하신거야 코코야 치코가 엄마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 해주길 지켜주렴 너가 있던 곳 마필두
예전에 명륜동에서 하숙할 때다. 명륜시장 통에 '풍년옥(거의 반세기 전이니 지금은 옥호를 밝혀도 되겠다)'이라는 주점이 있었다. 술 따르는 여자들이 있는, 그 때 말로 속칭 니나노 집이라는 술집이다. 버스에서 내려 하숙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술집을 지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좀 생경한 풍경을 몇 번 지나치게 된다. 그 집 술 따르는 여자들 중 굵고 검은 테 안경을 쓴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언뜻 지나치면서 느낀 바로는 검은 테 안경이 아주 지적으로 보였다는 것이고, 그런 모습의 여인이 주점에서 술을 따르는 게 묘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아무리 가난한 학생이지만, 언젠가 저 집을 가 저 여자와 술을 한 번 마시리라. 그러던 중 우연히 기회가 왔다. 학생운동으로 수배를 당해 피신하던 선배 한 분이 명륜동 근처에서 나를 불러 낸 것이다.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그 당시로는 거금인 5천원을 빌려 나갔다. 피신하느라 고생하는데 마음이나 좀 풀어드리자하는 심경이었다. 지쳐있는 선배를 보며 왜 그 검은 테 안경 낀 술집 여자가 생각난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튼 그 집, '풍년옥'엘 갔다는 얘기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 아주머니더러 그 안경 낀 여자를 좀 불러다 앉히라고 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피씩"하는 표정으로, 안방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더니 그 때 그 여자는 명륜 세무서 사람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 술집으로서는 아주 센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의 그 표정과 태도가 무시하는 것 같아 부아가 났다. 소주 4홉들이 한 병과 안주 하나를 시켜먹다 그냥 일어 나가면서 시비가 붙었다. 5천원을 술값으로 내면서 잔돈을 기대했는데, 그냥 챙겨버리는 것이다. 따지고 뭐고 하다 결국 험악한 상태까지 갔다. 그 와중에서도 수배 중인 선배가 생각 났다. 사고가 나 경찰이 오게되면 어떻게 될까라는 조바심이다. 하지만 선배는 먼저 그 점을 우려했던지 이미 술집에서 빠져 나가고 없었다. 그 다음은 얘기하기가 좀 거북스럽다. 거의 1대 10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항우같이 생긴 주인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내 얼굴을 한 대 갈기면서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 때 주인의 어떤 사인같은 것에 따라 어떤 여자가 부리나케 술집 문을 잠갔다. 가격당한 눈 부위가 부어 오르면서도 그 광경은 눈에 들어왔다. 그 검은 테 안경 낀 여자였다. 그 여자가 어느 새 안방에 튀어나와 문을 잠근 것이다. 난리 끝에 명륜파출소 순경들이 오면서 일이 복잡하게 됐다. 나는 부어오른 눈 부위를 증거로 폭력을 당했다고 했다. 술집 측에서 어이없는 주장이 나왔다. 주인 여자가 그 때 임신 중이었는데, 나의 발 가격으로 유산이 됐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술집 주인의 주장에 무게를 더 해준 것은 검은 테 안경의 그 여자였다. 내가 무전취식에다 막무가내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엄혹한 지경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 악다구니처럼 그런 주장을 하는 그 검은 테 안경의 술집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더 든 것은 무슨 이유였던지 모르겠다. 경찰들 앞에서 그런 증언을 하는 그 여자를 가까이에서 찬찬히 지켜 볼 여유(?), 그 또한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까이서 본 그 여자의 얼굴은 동그마니한 게 아름다웠다. 이지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눈을 유심히 봤는데, 간단없이 손으로 눈을 비비고 자주 검뻑거리는 것으로 봐 검은 테 안경을 쓴 것은 눈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여자의 증언으로 그 때 나는 꼼짝없이 당할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심야에 동대문경찰서까지 백차를 타고 가 조사를 받았다. 그러다 전세가 뒤 바뀌었다. 명륜세무서 사람들이 나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준 것이다. 주인 여자의 임신과 유산 주장도 거짓말이었다. 나는 새벽 통금 전에 풀려놨다. 어찌 된 연유인지는 몰라도 '풍년옥'은 호되게 당했다. 영업정지 15일 처분을 받은 것인데, 세무서 직원들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5천 원 가지고 있었던 것도 나에겐 유리했다. 그 돈이 말하자면 무전취식이 될 수 없는 '거금'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 후로 '풍년옥'이 어떻게 됐는지, 검은 테 안경의 그 술집 여자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 얼마 후 군에 입대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사건은 검은 테 안경의 술집 여자에 대한 나의 호기심, 그것도 부질없는 호기심 탓이다. 어떤 호기심이었을까. 시장바닥 주점과 검은 테 안경의 술집 여자는 언밸런스한 것 아닌가. 우선 검은 테 안경으로 보이기에, 참하고 지적으로 생긴 여자가 주점에서 술을 따르는 데는 필시 어떡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 게 뭘까하는 호기심이 아니었나 싶다. 나의 어설픈 호기심으로 인한 하나의 해프닝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하나의 추억거리로 이따금 씩 실소를 짓게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나에게 하나의 조그만 가르침을 남겼다. 그저 보이는 것,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 만으로 그 실체를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 촌부자
몇 년 간 자동차 관련 작은 사고들로 자동차 보험료가 많이 올랐었는데, 어렵사리 2년 연속 무사고를 달성하고 올해 할인 된 자동차보험료로 가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15년 60만원 > 16년 80만원 > 17년 100만원 > 18년 120만원 > 19년 80만원 대 초반)무엇보다 인생락서에서 '카포인트' 이벤트를 통해 올해 처음 인터넷으로 자동차 보험을 들고 추가 할인도 받아 감사한 마음으로 지난 4년 간의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합니다.2016년 봄.화창한 주말 아침에 큰 아이와 등산을 가려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 주차장에서 차를 빼고 있었다. 같은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분께서 주차 할 곳을 못 찾고 계신 것 같아, 잽싸게 빼드리는 미덕을 보여드리려다 그만..........후방으로 지나가는 다른 차를 못 보고 경미한 접촉사고를 내고 말았다.다행히 다친 사람도 내 차량에 큰 파손도 없었지만, 상대방 분의 차 범퍼에 금이 가 보험 처리를 하게 되었다.운전대를 잡은 이래 단 한번도 내 과실로 사고가 난 적이 없었는데, 보험처리하고 보험료 할증되는 것이 억울한 마음 보다는, 나의 무사고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것 같아 가슴이 쓰라렸다.결국 2016년 8월 말, 자동차 보험 갱신을 위해 확인한 보험료는 대략 20만원 할증 된 80만원. 아는 분의 지인이 보험 컨설턴트셔 매년 그 분에게 비슷하거나 조금 저렴해진 보험료로 갱신을 했었는데, 앞의 사고 이력 때문에 지갑의 상처와 함께 다시 한번 마음의 상처가 생기는 순간이었다.사고가 일어나면 보험료가 인상된다는 경험을 했기에(꼭 경험해봐야 아는 학습 능력 ㅎㅎ), 이 후 안전도 안전이지만 사고가 나서 또 보험료가 오를까 봐 정말 항상 만전을 기하며, 방어 운전을 했다. 심지어 아파트 주차장에서 자주 일어나는 '문콕' 같은 자차 사고가 날까 봐 주차할 땐 항상 조수석 쪽 주차 공간을 넉넉히 두곤 했다. (아버지께서 차를 쓰시는 날엔 여지 없이 "왜 이렇게 차를 대 놨냐" 라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2017년 또 봄.가끔 남동생이 내 차를 운전하는 경우가 있어, 언제나 처럼 형재자매까지 운전이 가능한 상품으로 보험을 들어 놓곤 했다. 막내 동생은 이라크에 파병을 나가, 심지어 대대장 운전병으로 복무했던 터라 사실 사고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원숭이 띠인 동생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었으니, 그 날은 동생이 천방지축 조카 4명을(우리 아이들과 여동생네 아이들까지) 태우고 과천 대공원으로 동물원 나들이를 갔던 날이다. 동생네 아이들과 달리 유독 다투며 자라길 선호하는 첫째와 둘째가 서로 자리가 좁다며 싸우던 걸 보던 동생. 마침 차들이 주차장 진입을 위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구간에서 그만 앞 차를 살짝 들이 받고 말았다.(주말에 과천 대공원을 가본 분들은 알 것이다. 주차장 입구에서 1km 이상 이어지는 대기 행렬, 주차장에서 차 한대가 나와야 그 다음 차가 진입 할 수 있는 구조)아마도 차가 정지한 참에 아이들의 언니랑 싸우고 목 놓아 우는 둘째를 진정 시키려 동생이 운전석에서 뒤로 몸을 돌리는 순간(!) 뒤 차가 경적을 울렸고, 급히 전진을 하다 그만 사고가 났다고 한다.다행히 이번에도 사람이 다치거나 내 차에 파손은 없었지만, 늘 그렇듯(?) 앞 차의 뒷 범퍼에 금이 가는 바람에 또 보험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2년 연속 접촉사고가 나며 2017년의 보험료는 100만원을 가뿐히 돌파해 버렸다.이 후 2018년은 무사히 무사고를 달성했지만, 사촌동생이 다니던 자동차 회사의 시승차를 저렴하게 구매하게 되어 차량가액이 올라가는 바람에, 그 해의 보험료는 심지어 120만원을 훌쩍 넘겨 버렸다. (근 3년 만에 보험료 2배로 ㅠㅠ)그리고 아기다리고기다리던 2019년, 온 가족은 합심해 무사고의 삶을 유지 했고, (2년 연속 무사고이니 보험료가 꽤 많이 낮아졌겠거니 하며)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올해의 보험료를 확인했다. 2019년 지인 설계사 분께 확인했던 보험료는 120만원 대에서 조금 낮아진 100만원 대 초반.아쉽게도 기대했던 만큼보다는 초라한 금액에 조금은 기운이 빠져 있었는데, 매일 눈팅만 하던 인생락서에서 우연히 '카포인트' 이벤트를 보게 되었다. 3만원이나 할인 받자는 마음으로 보험료를 조회해 봤다. 하지만 정말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금액. 80만원 대늘 들던 오프라인 보험보다 훨씬 싼 금액에 몇 번이고 다시 계산을 해 보았다. 게다가 카포인트 할인 3만원까지!!! 무슨 대학교 때 학점 잘 주던 교수님 과목 신청 할 때 처럼 빛의 속도로 가입을 완료 했다.무려 18만원 이상의 할인이 되다니, (사실 상관 없지만) 그 간의 무사고를 위한 온 가족의 노고가 한번에 보상 받는 것 같아 너무나도 기뻤다.결국 김연아님이 광고하시는 보험사에 가입을 했고, 절약한 돈으로 그 다음 주말에 온 가족이 모여 외식을 할 수 있었다.그리고 다짐 했다, 올해는 삼겹살이지만 내년엔 소고기를 목표로 무사고 !!!쿨팁 : 가입을 하다보니 블랙박스와 차선이탈방지장치 할인이 있길래, 우선은 만기일이라 그냥 적용 안 받고 가입하고 다음 날 콜센터로 전화를 했습니다. 상담원이 친절하게 인증 사진 몇 장만 올리면 추가 할인이 된다더군요. 잽싸게 보험사 앱에 사진을 올리니 다다음 날 꿀같은 비자금이 제 통장으로 입금 되었답니다.^^실제 가입한 금액 입니다. 최종 가입금액 788,450원 ^^ Jcarus
황성철(50, 노점 운영) “한번 잘 안되니까, 세 번 잘 안되더라고요. 허허.."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그는 동대문에서 노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회사생활도 했고, 사업도 했지만, 결국에는 잘 안됐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막노동부터 가리지 않고 했다. ⎯⎯⎯⎯⎯⎯⎯⎯⎯⎯⎯⎯⎯⎯⎯⎯⎯ - 동대문에 계신다고요? + 네, 거기서 노점을 하고 있어요.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든 매일 나가면서 일을 해요. 젊어서는 스물일곱부터인가? 5년 정도 회사생활을 하다가 내 일을 시작했죠. 내 일하다가 잘 안됐어요. 한번 안되니까, 세 번 안되더라고요. 막노동도 하고, 건축 일도 하고, 별걸 다 했어요. +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제 밖에 나와서 내 일을 하게 됐거든요. 처음으로 했던 일이, 벤처 붐일 때 정보통신 쪽 관련 일을 시작했어요. 인터넷과 이동통신 관련된 일. 먹고 살 정도는 됐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자본이 중요하더라고요. 버틸 수 있는 자금이 있어야 했는데, 결국은 말아먹었죠. + 젊었으니까 맨 주먹으로 다시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결국은 말아먹었죠. 쇼핑 관련한 도매업이었는데, 그것도 결국 버티지 못했어요. 그러다 싼 것보다는 비싼 걸 팔아보자, 해서 부동산을 시작했어요. 영업을 했는데, 잘 해서 땅을 직접 사서 판매를 했어요. 잘 되더니 싶다가 망했어요. - 엄청 크게 했었겠어요. + 컸죠.. 큰 만큼 부러지고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5년 정도.. 그러고 나니 40대가 되어버렸죠. 지금은 신길동 고시원에 지내고 있어요. 중간에 울산도 내려갔다, 7년 만이죠, 작년에 올라왔어요. + 계획이나 인연이 있어서 울산에 갔던 것도 아니고, 서울에 다시 올라왔던 작년에도 크게 무슨 수가 있어서 올라온 건 아니에요. - 가정을 꾸리지는 않으셨어요? + 꾸렸었죠. 첫 사업이 부러지니까, 친구들이 떠났죠. 두 번째 사업이 부러졌을 때 부모와 형제들이 떠났고요. 세 번째 사업이 망하고, 내 가족이 떠났죠. 많이 참았을 텐데, 고생도 많이 했는데, 재기할 상황이 못됐어요. 가정을 유지하는 게 오히려 해가 됐을 정도였으니까요.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까. + 딸과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요. 이제 스물한 살 됐는데, 대학교 2학년이겠네요. 해준 게 없어서 너무 미안해요. ⎯⎯⎯⎯⎯⎯⎯⎯⎯⎯⎯⎯⎯⎯⎯⎯⎯ 하루는 어떻게든 먹고살지만, 뭐라도 하려면 모아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든 모아서 유통 관련 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한계가 분명히 있겠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 ※ Interview - The New Grey Seoul※ 열린공감 '다시봄날 프로젝트' 게시판에서 더 많은 메이크오버 성공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인생락서관리자
장규석(62, 전직 군인) 31년 동안 군 생활을 했고, 최근 중령으로 예편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꿈은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특이하게도 그에게 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 생기게 된 꿈이었다. ⎯⎯⎯⎯⎯⎯⎯⎯⎯⎯⎯⎯⎯⎯⎯⎯⎯ - 군인이 꿈이셨다고요? + 초등학교 선생님이 키가 되게 적으셨는데, 그분께서 육군 사관학교를 가는 게 꿈이셨어요. 제가 첫 제자였어요. 저를 통해 꿈을 이루시고 싶으셨던지, 군대 생활 이야기를 늘 해주셨어요. 그 덕에 저는 일반 대학교를 가는 생각을 단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어요. + 지금도 선생님과 연락을 하고 지내요. 최근에는 스승의 날에 찾아뵙지 못했는데, 매년 스승의 날에 찾아뵀어요. 보통은 부모님에게 꿈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잖아요. 아버님도 딱히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경찰관이셨는데, 어렸을 때 부모님들 늘 얘기하시잖아요. 판검사, 국회의원, 대통령 해라. 군인이 된 걸 후회하진 않아요. 만족하고 있어요. - 가족분들에게는 어떤 아버지고 남편이셨어요? + 만 점짜리는 못되죠. TV에 나오는 아빠의 역할들을 보면, 충실하지 못했어요. 많이 비교되더라고요. 20점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함께 시간을 낸다는 것을 잘 하지 못했어요. 나라를 지켰기 때문에. + 사대주의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가정에 더욱 신경 못썼던 것도 있어요. 중대장 시절에 대원의 부모님이 면회 오셨다가, 제가 마음에 들었는지 집사람을 소개해줬는데요. 저는 좋았는데 집사람은 잘 모르겠네요. + 그래도 집사람에게는 권위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아이들에게는 보수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아들도 지금 중대장을 하고 있는데, 애들에게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어라, 얘기하기는 해요. 표현은 아직도 잘 못하지만요. - 이제 어떻게 시간을 보내실 거예요? + 그게 참 몇 년째 고민이에요. 좋아하는 게 뭔지,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전역하고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사진도 찍으러 다녀보고, 도자기도 만들어보고, 이런저런 자격증도 따고 있어요. 그것과 별개로 해보고 싶은 게 있어도, 이제는 건강 때문에 시작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지금은 매일 수영장에 가고, 주에 한두 번 골프장이나 당구장을 다닌다고 했다. 함께 군 생활을 했던 동료들과,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어떻게 지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 Interview - The New Grey Seoul※ 열린공감 '다시봄날 프로젝트' 게시판에서 더 많은 메이크오버 성공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인생락서관리자
추석이면 너무나 일찍 떠나가신 친정엄마가 한없이 그립고 보고싶다. 내 나이 스물여덟 이었던 1990년 8월31일, 한 달 넘게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하시던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6남매가 보내드린 것이다. 5년 동안 당뇨병 합병증으로 1년에 두어 번을 서너 달씩 병원 신세를 지셨던 엄마. 의사선생님이 오빠들에게 '이제 더는 의미가 없으니 그만 보내드리라' 하셨고 오빠들은 막내인 내게 얘기해야 한다며 며칠을 고민했다고 한다. 아들만 내리 다섯을 낳고 맨 밑으로 마흔하나란 나이에 늦둥이 딸을 낳게 돼 그렇게나 좋아하셨다는 엄마가 시집도 안가고 노처녀 소리를 듣는 고명딸에 막내딸을 두고 어찌 눈을 감으시겠냐며~ 그러나 병원의 그 `산소호흡기 없으면 생명이 아닌, 벌써 몇 년씩이나 그리 넉넉치 못한 살림에 대체 어떻게 감당하느냐`면서 `가능성이 있다면 자식들이 아무리 원해도 병원에서 허락하지 않으니까 이제는 결정을 하라` 는 의사선생님 말에 오빠들은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내게 넌지시 병원 뜻을 전했다. 난 다들 미쳤냐고 펄쩍펄쩍 뛰면서 병원비 내가 다 낼 거니까 쓸데없는 소리 다시는 꺼내지도 말라고 하고선 3일을 어찌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차라리 엄마를 보내드리는 게 더 편안하실 거란 오빠들의 설득에 더 이상은 못 버티고 내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고~ 장례식 날은 3일 동안 너무 울어서 눈물이 말라버린 나를 대신해 하늘에서 하루 종일 비를 내려 주었고 난 그렇게 68세의 엄마와 이별을 했다. 사시는 동안 늘 신경통과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며 그 많은 아들들의 부양이 아닌 막내딸인 나의 부양을 받는 걸 무척이나 미안해하시고 자존심 상해 하셨던 엄마의 삶이 왜 그리도 안쓰럽던지~ 그렇게 슬픔을 애써 누르며 힘들게 살고 있을 때, 다니던 직장도 시큰둥해져서 그만두었고 늘 그랬듯이 금방 전 보다 더 나은 직장을 다시 구할 줄 알았는데 웬걸~ 6개월이 지나도록 맘에 드는 곳을 못 찾아 백수 생활을 하게 됐다. 슬픔에 비참함까지 더 해져 아픈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내 가슴을 마구 헤집고 파헤쳤다. 더 아프고, 더욱 더 서럽게 만들었던 그 노래.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 때를 기억하오. . .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 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경우 바르고 똑똑하시며 남자보다 더 호탕한 성격이셨던 엄마는 밖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존중받는 분이셨는데 권위적이고 여자를 좀 무시하는 경향이셨던 울 아버지와는 사이좋게 어딜 다니시긴커녕 다정한 말 한마디 잘 나누지 않고 지내셨다. 그런 엄마가 안쓰러워 난 아버지를 조금 미워했고~ 이 노래를 듣는데 60대에 저렇게 다정하게 사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뭐 그리 급하다고 일찍 가셔야만 했을까~란 생각에 미치도록 엄마가 그리웠다. 지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된 이 노래는 김목경의 노래였는데 나중에 내가 광팬이 된 김광석씨가 불러 더 좋아하게 된 노래이다. 2년 전에 라디오프로에 썼던 글이다. 사랑별곡
   사람이 선물이다..    스믈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를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고..    쉰에야,    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디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얼굴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얼굴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선택이 삶의 선택입니다    사람은 실수하는 것이 정상이고    신은 용서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랑이란,    실수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사랑은..    사람과 하늘이 나눠가진 성품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만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지요    사람과의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자신을 내려놓기 전에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중요하다는것을 느낍니다    일은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사람관계는 한번 깨지면 회복하기 힘듭니다    관계가 고통스러운 까닭은    신에게서만 찿을 수 있는 것을    인간에게서 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수가 전공이고    부족함이 특징입니다.♧            -조정민의 <사람이 선물이다>중에서 -    아이미소
젊은층에게는 낯선 노래일지 모르지만 중년층에게 매우 익숙한 아바(ABBA)의 [I have a dream] 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I believe in angels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I believe in angels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I 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I 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이 노래를 들으면 실망과 자포자기 낙담하여 넘어지고 자빠지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없던 힘도 생기는 것 같고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 같은 긍정적인 마음과 희망이 쏟아난다. 지금도 내 휴대폰에 다운로드 되어있어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 서론이 좀 길어졌는데 드디어 버킷리스트에 간직했던 중년의 꿈!  개인 시. 사진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연유를 설명하면 [인생락서]를 알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 [인생락서]를 통해 자서전이나 일기장 제작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유추하여 시집을 만들어 보겠다는 오래 전 생각을 실행하고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몇 달 전 [인생락서]를 알게되었고 조심스레 첫 글을 올렸는데 회상하니 2019년 4월 3일이었다. 2017년 뉴질랜드 밀포드 트레킹에서 영감을 얻어 구상하고 쓴 [돌탑]이라는 시 였다. 그 후 첫 댓글을 달아 주시며 알게 된 [서쪽하늘]님이 또 다른 인연이 되어 출판에 대해 많은 글을 나누며 정보를 교환했다. 사실 나는 시와 사진들을 준비는 해놓았지만 출판사에 년말 즈음 일괄 의뢰할 계획이었다. 어설프게 머리를 쥐어 짜며 시집을 만들어가는데 마침 미국에 유학 중인 둘째 아이가 귀국해서 편집하는 방법과 출판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쳐 주었다. 제작 중간에는 미리 예정된 일정이라 불가피하게 킬리만자로 트레킹을 다녀왔다. 전화위복 이라고 위안하며 여행중에 출판 제작 중단한 작품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도 하고 오. 탈자는 크게 없으나 미흡한 부분이 눈에 들어와 수정을 했다. 그런 연유로 출판이 늦어졌고 보잘 것 없지만 몇년 간의 노력이 결실을 보게되었다. 컴퓨터 세대가 아니다보니 글을 올리고 사진을 확대. 축소하고 편집하는 과정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우여곡절 끝에 많은 것을 배우면서 내 손으로 내 책을 만든 것이다. 아직 표지 제작은 어렵지만 다음에는 표지 제작도 배워서 더욱 충실하고 멋진 시집을 만들겠다는 각오와 용기로 다음과 같은 격언을 되새기며 과감하게 [시. 사진 1집]으로 출판했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Dreams come true!] 평산
밖에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어서 외출하는 대신 "어린 의뢰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어린 남매가 계모로부터 학대를 당하며 살던 중 새엄마의 폭행으로 장 파열이되어 결국 남동생이 죽었는데새엄마가 자기의 죄를 어린 딸에게 뒤집어 씌우기까지 하는 것을 보고 의로운 변호인이 자신의 직업마져포기한 채 어린 소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법정싸움을 한 끝에 계모에게 징벌을 주고 아이를 구하는  정말가슴아프면서도 변호사의 따뜻한 인간됨에 찐한 감동을 느끼게한다.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도모르게  "그 아이는 지금 어찌 살고있을까?" 하며 '나도 그 때 그아이에게 좀 더관심을 갖고 보살펴 줬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하니 어딘가에서 살고있을 그 아이에게 미안한마음이 들고 때늦은 후회가 되어 콧날이 찡해온다.그러니까 지금부터 33년 전이다푹푹 찌는 듯한 여름, 그날도 나는 아기를 업고 양복 원단을 구입하기위해 동대문 종합시장에 다녀와야 했기에아기를 업고있는 것을 본 옆가게 주인아줌마가 "아기를 업고 동대문시장을 다녀오기에는 너무 더운 날씨네요, 시장에 다녀오는 동안 아기를 봐줄테니 어서 다녀오세요."아기를 맡겨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원단을 끊어 가게에 들어서니 10살쯤돼보이는 아이가 우리아기와 같이 놀고있었다. 나는 "아기와 잘 놀아줘서 고마워." 하고는 아기를 업고 집으로 가려는데"아줌마, 저도 같이 집에가서 아기랑 더 놀면 안돼요?""그래, 그럼 같이가자".집으로 같이온 아이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아기랑 같이 재밌게 노는동안 나는 부지런히 저녁을 해서 먹인 후"집에서 부모님이 걱정하실테니 오늘은 그만 집에 가고 다음에 또 놀러와."했더니"아줌마, 저 오늘 밤 여기서 자고가면 안돼요?""네가 집에 안가면 엄마 아빠가 많이 걱정하셔서 안돼, 더 늦기전에 얼른 가서 자고 내일 오렴."자꾸 재촉해도 도저히 가려고하지않는 아이에게 집 전화번호를 물었더니 집전화가 없다고하며 알려주지않는바람에 "그럼 오늘 하루만 자고 내일은 꼭 집에 가기로 약속하자."는 말을 한 뒤 아이들과 같이 재운 이튿 날아침 밥을 해 먹인 후 " 이제 빨리 집에가서 책가방 챙겨 갖고 학교에 가거라."하는 나에게"아줌마 저 그냥 여기서 아기랑 같이 놀면 안돼요?" "아기랑 노는 것도 좋지만 학교에 갔다와서 놀아야지."아무리 설득해도 가려고하지 않아 생각끝에 옆가게로 전화를했다. 그아이의 집에 전화번호를 아신다면 아이가 우리집에 있으니 데려가시라는 전화를 좀 해달라고...얼마나 지났을까, 아이의 아빠라는 분이 찾아와 가자며 아이의 손을 잡으니 아이는 나의 뒤에 숨어 내옷자락을잡고 가기싫다며 꽁무니를 빼보지만 아빠의 손에 이끌려 뒤돌아보는 아이를 그냥 보냈다.그 때는 아이의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왜 그렇게 집에가기 싫어했을까? 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 던 나 였기에 아이의 그 아픔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당시 내가 조금 더 아이의 눈을보며 따뜻이 보살펴 주었더라면,  그아이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더라면 얼마나좋았을까~~~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씁쓸한 마음이든다.다만 지금은 40대 중반에 들었을 그아이가 항상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잘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늦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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