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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추천스토리

  2019년 4월 3일은 일 년 전 우연히 [인생락서]를 알게 되고 가입한 날이다. 삼성카드에 가입한 기간은 상당히 오래 전 일이지만 개인적 무심함으로 삼성카드 홈페이지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차츰 [인생락서]를 통해 자서전이나 일기장 제작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부분 일기나 자서전에 많은 글을 남겼지만 문예창작소에도 시나 에세이 등을 남기다 보니 오백여 편을 올리게 되었다. 유추하여 시집을 만들어 보겠다는 오래 전 생각을 예상보다 빨리 실행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삼성카드를 통해 [인생락서]를 알게 되었고 조심스레 첫 글을 올렸는데 회상하니 2017년 뉴질랜드 밀포드 트레킹에서 영감을 얻어 구상하고 쓴 [돌탑]이라는 글로 개인적인 추억이었다. 그 후 첫 댓글을 달아 주시며 알게 된 문우 [서쪽하늘]님, [별새꽃1]님과 [아이미소]님, [보덕]님도 또 다른 인연이 되었으며 아내 다음으로 많은 이야기와 많은 글을 나누며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는데 [인생락서]가 연결한 아주 특별한 인연이라고 하겠다.   ♡ 돌탑 [돌무덤]   산새도 날개 접고 구름도 잠시 쉬는 잘루목 돌고 도는 능선 길 산허리에서 등성이 까지   사랑으로 숨어들은  사랑꾼처럼 深山幽谷[심산유곡] 오두막 호롱불 밝히고 남몰래 길을 닦는다   야생화도 실족할 벼랑  바위를 다듬고 들어내 험로를 풀고 펴서  꽃길을 놓은 산사람   하늘 오르는 마루금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맑은 영혼의 위대함 고결한 사랑 아가페여!   ♡ 2017년 1월 3일  Milford Track,  Mackinnon Pass(1888년 탐험 개척)에서     돌이켜 회상하니 작년에도 좋은 글을 교환하며 공감했던 많은 분들이 계셨지만 일 년이 지난 2020년 4월 3일 현재 [인생락서]는 글 솜씨가 좋은 회원 분들이 엄청 증가한데다 기존 동호인들의 일취월장 발전한 글에 깜짝깜짝 경기를 느끼며 감상을 하고 있다. 이런 글 솜씨는 애정과 노력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멋진 돌탑처럼 조형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좋은 글에는 서로 댓글을 달아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고 喜怒哀樂[희로애락]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오는 글에는 함께 공감하며 아파하고 위로해주시는 친구 분들을 알게 됐으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고맙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사실 나는 시와 사진들을 조금씩 준비는 해놓았지만 추후 출판사에 일괄 의뢰할 계획이었다. 서론이 좀 길어졌는데 어쨌든 선연으로 만난 [인생락서]를 통해 필력을 키우고 자신감을 얻으며 버킷리스트에 간직했던 중년의 꿈! 졸필이나마 개인 시. 사진집을 출판하게 된 것도 큰 행운이었다.   1 번 [돌탑]에서 540번 [들꽃 경연을 시작하다!] 까지 크고 작은 회의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인생락서]의 무한한 독려와 문우들의 끊임없는 응원 덕분이다. 이런 선의의 관심이 여러 이유로 포기하려는 순간에 의지와 격려가 되어 힘을 내어 돌탑을 쌓는 경건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19의 습격으로 전 세계가 마비되고 곤경에 처해있다. 이럴 때 일수록 의기소침하지 말고 생동하는 봄처럼 희망을 갖고 각자의 위치에서 슬기롭게 협조하여 난국을 벗어나야겠다.  앞으로도 [인생락서]에서 아름답고 진실한 글과 작품으로 개인적으로나 국가, 세계 역사에 남을 멋진 모뉴먼트 [돌탑]을 가꾸어 나가면 좋겠다.   평산
한동안 글쓰기는커녕 글을 읽기도 힘들었다. 인생락서 문예창작소에 올라온 글을 읽는데 그저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글의 내용이 하나도 안 들어온다고 할까~ 분명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읽는 순간 잊혔다. 억지로 글을 써서 올리고 따뜻한 위로의 글과 많은 응원의 글들에 댓글을 달면서 소통하다 보니 서서히 잔잔하고 재밌는 글, 슬프고 아픈 글들이 읽혔다. 원래 쑥스러워서 먼저 댓글을 잘 안 다는 편인데 이번에 몇몇 분들의 댓글에서 큰 위로가 되어 나도 이제부턴 공감되는 글에 댓글을 달기로 했다.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받고 느낀 것은 나도 돌려주고 표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받고도 감사의 인사를 돌려주지 않는 것은 좀 무례하고 몰염치한 처신인데 지금껏 내가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물건이 아니라 댓글이라는 이유로~ 받은 댓글에는 열심히 성의껏 답을 했지만 그들의 글에 내가 먼저 댓글을 쓰지는 않았던 것이다. 고작 쑥스러워서 못 한다는 그 이유 하나로~ 그래서 나도 열심히, 성심성의껏 댓글을 달아보자 생각했다. 헌데 이게 참 쉽지 않다는 걸 또 절실히 깨닫고 말았다. 글을 읽고 댓글을 달려고 하는 순간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생각이 하나도 안 난다. 중언부언하는 것 같아 썼다 지우고는 막막하게 멈춰있는 모습을 본다. 그제서야 타인의 글에 공감해 주면서 하나하나 정성껏 코멘트를 달아주는 님들이 얼마나 가슴 따뜻하고 대단한 사람들인지 알게 됐다. 처음 들어와 글을 쓴 사람들이 그들로 인해서 낯선 시간을 빨리 보내고 익숙해질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나 역시 그랬고~ 처음엔 '모두에겐 쉬운 일인가~'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도 그건 결코 쉬운 일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된다. 어찌 쉽겠는가~? 함께 느끼고 기뻐하거나 슬퍼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다. 설령 공감을 했다손 치더라도 툭 던지는 글이 아닌 정감이 가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할 텐데 그냥 마구잡이로 쓰진 않을 거 아닌가. (물론 가끔 개중엔 그렇지 않은 이도 있겠지만~) 내 경우를 보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곳 인생락서의 마음 예쁜 댓글러 님들에게 이 글을 통해서 감사와 찬사를 보내고 싶다. 👏👏👏👏👏 여러분들로 인해 인생락서가 보다 더 풍성해지고 따뜻한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님들, 참으로 고맙습니다. 누구누구인지 다들 아시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도요~~~❤ *이제 목련은 가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랏빛 라일락 꽃이 오기 시작했다. 사랑별곡
모처럼 친구도 쉬고 해서 나도 출근을 하지 않은채 모처럼 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언젠가 한번 갔던 강진쪽으로 고사리를 꺾으러갈까? 아니면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으로 갈까 생각 하다가 수목원으로 결정을했다 나는 준비도 없이 나섰는데 친구는 가방 가득 먹을거리들을 준비해 와서는 가는동안 요것저것 입안에 넣어주면서 잔정을 느끼게했다 수목원은 평일인데도 삼삼오오 친구끼리 연인들이 그리고 가족들과 끼리 끼리 여유를 느끼는 모습이 보는사람도 편안함이 절로 느껴졌다 테마별로 이쪽길은 튜울립꽃으로 저쪽에는 야생화 또 다른쪽에는 다육이들로 사뭇 다른느낌으로 잘가꾸어져있었다 튜울립 우거진 꽃길 끝나는 곳에 조그만 교회당 조용히 기도하고 가라는 문짝위의 글귀가ㅈ더 조용하게 느껴져 문열고 들여다보니 긴 의자 네개쯤 ᆢ 그리고 내려오니 야외 공연하는곳인지 아직은 이르지만 무대앞 나즈막하게 준비된 의자는또다른 흥미를 자아내고 소나무숲아래 길게 늘어선 벤치에 모자를 눌러쓰고 친구는저쪽 나는 이쪽 자리를 잡고 누우니 틈새로 푸른 하늘과 맑은 햇살이 쏟아져내려 눈이 부시다 한참을 누워 있는데 갑자기 돌개바람이 산위에서 아래로 수차례 떠내려와 바람기가 오싹 한기를 불러세운다 다시 천천히 걸어오다 친구가 꺼내놓은 과자를 부시럭 거리며 주섬주섬 입에 넣었더니 갑자기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요럴때 따뜻한 커피한잔을 곁들인다면 금상첨화일텐데 넋두리를 하며 또 내려오다 입구에 다다르니 온갖 다육이 난 그리고 알수없는 꽃들이 각양각새의 자태로 자랑하는ᆢ 모두 한두개 꽃이나 식물을 사서 함밥 웃음으로 나선다 우리도 한바퀴 돌아보는데 앙징맞은 다육이 그리고 향이 짙은 치자꽃이 눈에 들어오는데 친구도 내마음 같아 내가 한바퀴 돌아보는 사이에 치자꽃이 두어송이 핀 화분은 어느새 사고 있었다 "이건 니꺼" 내미는데 향이 꼬끝으로 가득 메달린다 친구는 화초키우기를 좋아해서 가끔 놀러가면 베란다 가득 별별 꽃이 피고 지고 메달려있는지 탐스러워 때로는 촉 하나를 얻어오기도 하고 때로는 분가를 시켜 나눠주기도 하는데 나는 정성을 들인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려 늘 안타깝닥고 했더니 햇볕 바람 물주는 시기에 따라 그리고 식물 꽃의 종류 섭생이다 달라서 관리하는것도 쉬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창가에 두고 물만 열심히 주면되는 줄 알고 그랬더니 또 뿌리가 섞어버리고ᆢ 오늘 선물받은건 정신차려서 키워보리라 생각을 하면서 향기를 맡고 또 맡으면서 수목원을 나서며 길가 즐비한 가평의 명물인 잣두부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지난번 친구들이랑 와서 청국장을 먹은 기억 그리고 맛있었던 기억로 들어섰는데 주인이 바낀건지 너무 성의없는 음식에 투덜거리며 그래도 배고픔을 지우고 후식으로 친구는 늘 따뜻한커피 나는 이제는 시원한 커피한잔을 마시며 남아있는 이야기를 나누기에 시간이 바쁘게 지나갔다 친구는 다정다감하고 단아하다 지금부터도 친구는 시골 어느곳에 터를 잡고 터서리에 나무 꽃 나물 심고 가꾸며 꽃차를 만들어 오가는사람들과 나누며 차값을 주면 받고 안줘도 그만인 그런 전원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는 나는 아직 그런꿈을 그런생각은 해 보지않앟다는 말에 친구는 "너는 현재 삶이 여유로와서 그래~~"라고 했지만 나는아직도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런거라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세월이 어느틈에 시간이 우리를 여기다 데려다 놓았는지 세월의 무심함에 다시 놀라며 또 뉘엿뉘엿 해가지고 어둠이 찾아드는 하루의 마무리를 친구와 하면서 건강하고 즐거울수있기를 바라면서 친구가 챙겨주는 여분의 화분을 받아들면서 그렇게 헤어져왔다. 좋은나들이 좋은선물 좋은 하루가 되었다 로고스
‘Mehdi 메흐디‘는 뉴욕 태생의 이란계 미국인으로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Contemporary Instrumental Music, Synthesizer 연주가이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뮤지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음악은 일상의 가벼운 즐거움을 넘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고양시키고 매료케 하는 경험을 안겨준다. 그것은 우리와 자연 사이의 공존을 묘사하고 나의 삶에 대한 해석이며 믿음이다. 마음을 달래주고 영혼을 위로해 주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을 회상케 해주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단 하나의 말이 있다면 사랑이다. 사랑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기적들, 모든 꿈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 축복이 가득하길” 오늘은 하루 온 종일 ’메흐디‘ 음악에 몰입하고 싶다."Music can be an uplifting and fascinating experience, one that transcends casual entertainment. It is my translation of life and I believe it describes relationships between ourselves and the entire natural world. Consider this music as a tool to quiet the mind, soothe the soul and as a reminder of life’s sweetest most cherished memories. If I had only one thing to tell the world, it would be to love. Blessed are those who understand what miracles love can accomplish, for it is the power of love that makes all dreams a reality.“ -soothingmusic.com Mehdi’s page주말 이른 아침에 내리는 빗소리가 허전한 마음을 적신다. 금방이라도 ‘할부’하며 달려 올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귀에 쟁쟁 울리는 듯 하다. 일주일간의 양평 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 간 손녀딸 이다. 집이 절간 같아서 외출하면 늦게 들어가게 된다는 아이 외할아버지의 푸념과 미국에서 방학이라 귀국하여 14일간의 자가 격리를 마친 하나뿐인 이모가 무척 보고 싶어 한다고 연락이 왔다. 일주일 이상 돌봄은 무리일 듯 싶기도 하여 어제 서울 제집으로 돌려보냈다. 헤어진지 채 하루가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우리 집이 寂寞江山 적막강산이 되어 버렸다. 고요함 속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자니 얼핏 메흐디의 연주곡들이 스쳐 지나간다. 메흐디의 여섯 번째 앨범 Instrumental Escape 첫 곡으로 수록된 ‘One Child’s Prayer’ 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rQC49Iasvzk’메흐디‘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은 크로스오버, 뉴에이지 계통의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2000년 전후이다. 뉴에이지 음악은 신디사이저나 어쿠스틱 악기를 이용해 동서양의 교감을 표현해 편안하고 감미로운 느낌이 들기 때문에 스트레스 해소나 심리치료, 명상음악으로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시크릿 가든, 야니, 죠지 윈스톤, 앙드레 가뇽, 유키 구라모토 등이 우리에게 익숙한 대표적인 뉴에이지 아티스트라 할 수 있겠다. ’Mehdi‘ 음악의 매혹적이고 장엄한 멜로디는 ’우주적 오케스트라 사운드‘ 라는 표현에 손색이 없다. 그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경이로움과 평범한 일상의 축복에서 음악적 영감을 가져온다고 한다. 이렇한 그의 앨범 판매 수익금 일부는 ’글로벌 飢餓 기아 퇴치‘ 프로그램에 기부되고 있다. ’눈을 감고 메흐디의 음악에 온몸을 내맡겨라. 당신을 환희의 경지로 이끌 것이다. 그의 음악은 신선하면서 정말로 살아 숨 쉬는 음악이다.‘  2002년 발매된 Mehdi의 여섯 번째 앨범 ‘Instrumental Escape’ 앨범 자켓에 소개된 ‘We are one’ 제목의 짧고 평이하면서도 아름다운 글 전문을 옮겨 본다. ‘We are one’You are the song and I am the musicYou are laughter and I am smileYou are light and I am the cellYou are consciousness and I am the thoughtYou are eternal power and I am strengthYour peace and I are oneYour joy and I are oneYour wisdom and I are oneYou and I will be one for ever more어른 신발 사이로 한 켤레 놓인 손녀의 앙증맞은 꽃신이 현관, 집안의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는다. 어린 아이가 있는 집안에 ‘사람의 기운’, 神靈(?)스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은 섬뜩한 옛말도 있다. ‘노인네 머무는 방에서는 송장 썩은 내가 나고 어린 아이가 잠든 방에서는 꽃향기처럼 향긋한 향기가 맴돈다.’ 식탁에 아이가 놓고 간 곰 인형이 느닷없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아이와 함께 강변 자전거길을 산책하며 내려다 본 강물이다. ”할아버지, 갈매기야. 저 다양한 구름 좀 봐.“ 중세의 성처럼 뾰쪽 뾰족한 탑의 형상을 세워 만들어 놓은 강 건너의 '모텔'이 눈에 들어왔는지, ”할아버지 저기 성이 있다. 집에 가서 엘사 드레스 가져와“ 하면서 갈아입고 성에 가봐야 한다고 한다. 이제는 제법 문자를 써가며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세돌을 막 지난 아이의 상상력, 관찰력, 표현력이 놀라울 때가 있다. 씽씽타고 달리다가 지쳤는지 안아달라고 하여 강물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품속에서 스르르 잠든 아이의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이 모든 것 부질없는 것이려니 생각하던 차, 뜬금없이 천상병 시인의 ‘강물’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강 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언덕에 서서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거유당
#14 오빠만 다섯인 내게 언니가 생겼다. 1976년 12월 26일. 선명하게 날짜를 기억하는 건 거의 십년도 넘게 큰 방에 걸린 축 결 혼 .이라고 적힌 거울 덕분이었다. 그 때는 결혼이나 개업 선물로 거울,시계를 제일 많이 했었다. 여덟 살, 국민학교 2학년 겨울, 산을 몇 개 넘어 넘내~라는 동네에서 큰 오빠의 색시가 시집을 왔다. 족두리를 곱게 쓰고 연지곤지 찍고 꽃다운 스물 다섯 없는 집 맏며느리로 파란만장 첫 발을 디딘 언니를 보며 난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아침부터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집으로 모였고 하루 전 신부의 집에서 혼례식을 치루고 다음 날 신랑집으로 왔다. 신부가 처음 온 날은 사람들이 신부를 구경한다고 족두리에 혼례복을 입고 팔은 겹쳐 꼼작없이 아랫목에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했다. 쳐다보는 사람들은 한 번씩 쳐다보면 그 뿐이지만 앉아 있는 신부는 고문이 따로 없었다. 신부였던 큰 언니는 감기까지 걸려 코가 나오는데 보다못해 친한 친척 아주머니에게 손수건을 좀 주라고 부탁했다. 큰 언니는 손에 손수건을 받아 쥐고는 감기든 콧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엄마와 아버지의 생일이 음력 8월이었다. 큰 언니의 생일은 음력 2월, 나와 같은 달이었다. 엄마는 큰 언니의 생일이 음력8월이 아닌것에 대해서 종종 내게 불만을 표시했다. 이유인즉 한 집안에 성이 다른 사람이 같은 달에 세 사람이 있으면 큰 부자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생일이 8월인 아가씨와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결국 못하고 선을 다시 봐서 큰 언니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큰 부자가 되지 못함을 엄마는 큰 며느리 탓하길래 어느 날은 크게 한 소리 한 적이 있었다. "그기 우예 언니 탓이고~ 오빠들 장사밑천 친척들한테 빌려준 엄마탓이지~없는 집와서 죽자살자 고생만하고 엄마딸이 큰언니처럼 저래 살만 엄마마음 좋겠나!" 그 이후로 엄마는 다시는 생일을 논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며느리들에 대한 작은 험담도 하나뿐인 딸인 내게는 물론 어디에서도 꺼내지 않았다. #15 동네사람들은 아버지를 바보!라고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았고 생활을 야무지고 뜨럭까지 물청소를 하는 등 방이며 마당 어느 한 곳도 정리정돈이 안 된곳이 없었다. 그 정도로 엄마는 부지런했고 찬장 놋그릇안에는 항상 돈이 수북히 담겨있어 등교때마다 군것질이나 학용품사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난 몰랐는데 친구들이 늘 풍족했다며 그때는 부러웠다고 나중에 이야기해서 알았다. 어느 날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와서 마루가 아닌 뜨럭에서부터 신발을 벗어 마당에 놓는걸 보고 왜그러냐고 물으니 넘 깨끗해서 마당에서 벗고 올라가는게 아니냐고 물어 황당했던 적이 있다. 아버지와 엄마도 그 흔한 부부싸움없이 지냈다. 일생 딱 한 번의 부부싸움을 목격했는데 "영아야~토란밭에 아부지 계시니 점심 잡수라캐라~" "아부지예~엄마가 점심 잡수러 오시라 캐예~" 아버지는 퉁명하게 "안 묵는다 캐라!" "???" 그러고는 토란대를 낫으로 심술궂게 자르시는 모습이 엄마,아버지의 부부싸움 뒤 끝이었다. 싸웠던 이전의 상황도 물론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마누라 바보였던 것이다. 엄마가 하는대로 하나에서 열까지 사랑을 빙자한 절대믿음 같은 것이었다. 막내오빠가 숨어 자던 벽장에는 아버지의 비밀금고가 있었다. 어릴때나 지금이나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탓에 아버지의 궤짝이 궁금했다.작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열쇠는 따로 보관을 했었는데 집요한 성격탓에 열쇠를 찾아 나무궤짝을 열어보니 요즘의 진품명품에서나 볼듯한 한문빼곡한 고서적과 문서가 묶여 있고 지폐도 수북히 있었다. 아버지가 따로 모아 두는 비자금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한문도 막힘없이 줄줄 읽으셨고 제사 때 지방도 가는 붓으로 먹을 벼루에 갈아 붓글씨로 쓰는 박식한 사람이었으나 오빠들이나 내게는 하늘 천 따 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부모님께 큰 불만은 없었으나 교육열에 대해서는 좀 그랬다. 오빠들을 고등학교라도 가르쳤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아버지의 왼손은 장애가 있었다. 주먹이 쥔 상태로 평생을 농사일, 나무를 했고 아카시아 나무를 작은 도끼로 불때기 좋게 자르는데 손에 가시가 안 박히는 날이 없었다. 소죽을 끓이는 불 앞에 앉으시면 "영아야~ 바늘 가꼬 와바라." 불러 가르키는 부분을 보면 작은 점처럼 가시가 박혀 있었다. 바늘이 아버지 손을 찔러도 아프지 않은 아버지의 손은 100년 넘은 거북이 등짝처럼 투박하고 두꺼웠다. 된장냄비나 군고구마를 보호 장치 없이 맨손으로 만졌다. 아버지는 평생을 일만하는 우직한 농부였다. 아버지의 엄마에 대한 절대믿음은 믿는 도끼가 되어 평화로운 우리가정을 사정없이 찍기 시작했고 그 누구의 간섭없음이 엄마의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어 결국 큰 사건을 만들었다. 둘째,넷째 오빠의 장사밑천을 40년전의 돈으로 4천만을 가량을 친척들에게 빌려서 준 것이었다. 아이템이 산뜻 한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창의적인 신박한 창업도 아닌 그냥 큰 시장에 큰 장소를 임대해 아주 많은 종류의 가방을 파는 가방장사를 시작했다. 얼마를 벌었는지를 묻기전에 딱 1년만에 장사를 접었고 그 때부터 가족이 아니라 원수처럼 돌변해 우애는 산산조각이 났고 가족은 얼굴만 마주하면 누구 목소리가 더 큰 지 누구 원한이 더 깊은지 고함과 울음이 섞이는 니탓이라는 대화로 시작해서 동물적인 의성어로 막이 내린다. 설 추석은 없애야만 되는 비극적인 행사였고 가족,가정은 돈 앞에 무너지는 힘없는 썩은 나무둥치였다. 큰 오빠 결혼 후 얼마 안 있어 결혼했던 사건의 중심인물인 둘째오빠는 캐나다로 돈을 벌러 떠났고 넷째오빠는 죄책감으로 가족들과 연락을 끊은 채 잠적했다. 남겨진 가족들은 떠안은 빚을 전력투구 갚아나가야 했다. 엄마는 촌에서 대구로 직장을 얻어 나왔고 큰 오빠는 소와 논을 팔아 정리가능한 범위까지 갚았고 셋째오빠는 월급으로 받은 돈을 급한 빚부터 먼저 갚고 막내오빠는 힘들게 고등,대학교를 다녀야 했다. 난 중학교때는 그 당시 3만원 못되는 수업료를 납부하지 못해 항상 교무실이나 행정실에 불려가 날짜를 약속해야 했다. 어느 해는 큰 언니가 결혼반지를 팔아 공납금을 내 주기도 했고 고등학교도 내가 벌어서 하는 야간상고를 선택해야했다. 그 빚을 갚는데 10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그리고 중3때 부터 아버지가 편찮으시기 시작했다. 밤마다 가슴을 부여잡고 통증을 호소하며 힘겨워 했다.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고 주당이라고 사돌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초상집을 다녀 온 것이 문제가 되었고 거기서 먹은 음식이 잘못 되었다고 했다. <계속> ~~~~~~~~~~~~~~~~~~~~~~~~~~~~~~ 그 이후~ 나의 결혼식때 예쁜 18K 반지를 내 결혼반지 보다 더 비싼걸 큰 언니한테 선물했다. 중학교 나의 수업료 납부한다고 팔았던 언니의 결혼반지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반지 선물을 받고 마흔 한 살 큰 언니는 활짝 웃었다. 이쁘다고 고맙다고 했다. 캐나다에서 돈을 벌어 온 둘째오빠는 경매로 집을 샀다. 그것이 발판이 되어 지금은 조물주 위의 건물주가 되었다. 형제들의 고생에 대한 정식사과나 정식보상(?)은 없이 그냥 형제니까 묻어가며 잘 살고 있다. 겉으로는.. 그러나 6남매중에 조금 왕따의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첫 경매로 산 건물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신다고 둘째 올케가 말했다. 집을 팔아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자꾸 안 좋은 일이 있어 어디 물어봤더니 왜 그집에 계신 아버지를 안 모셔왔냐고 아버지가 보살펴주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냐며 점쟁이한테 혼났단다. 당장 살던 집에가서 술 따르고 사죄백배했단다. "아버님~계신 줄 몰랐슴더~죄송합니더~이사한데로 옮겨 가입시더~"그렇게 아버지의 혼을 모시고 새 집으로 갔다한다. 장사를 하기전 직장다니던 둘째 오빠는 아버지께도 내게도 극진했다. 도시의 최고 물건을 항상 아버지께 사드렸는데 많은 물건중에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재색 밍크쟘바 도톰한 것과 아버지 환갑선물로 문을 여닫는 티비를 우리 동네서 제일 먼저 사 줬다는 것이다. 김일 프로레슬링이나 복싱경기가 있는날은 17인치 여닫이 문이 달린 티비가 영화관 대형화면처럼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사랑방으로 모였다. 나와 막내 오빠에게도 설,추석빔을 도시아이들이 입는 세련된 디자인으로 명절이면 꼭 사다주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아계실때 받은 효도를 돌아가시고 둘째오빠네 부자만들기로 갚아주셨던가 보았다.부모가 돌아가시면 당신에게 제일 잘해준 자식을 돌봐준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연락두절이었던 넷째오빠는 서울로 와서 신문종이 덥고 자는 노숙생활을 시작으로 자수성가해서 좋은 차 좋은 아파트에 잘 살고 있다. 며칠전 주말농장 야채와 용돈을 내게 주고 갔다. 내가 3년 엄마를 모시던 때에도 주말마다 아침6시에 엄마랑 나를 태워서 드라이브 시켜주고 비싼 장어등을 사줬다. 우리집에 불이 났을 때도 통장에 돈을 통크게 보내주기도 하고 형제들에게도 늘 제일 큰 금액으로 도와준다. 오빠 소생의 자녀가 없어 우리집 세눔이 돌아가며 그래도 조카노릇을 하고 있다. 항상 가는 것 보다 되돌아 오는 것이 몇 곱이나 크다. 17살까지 오줌을 싸서 맨날 때렸다며 엄마는 후회하시기도 했지만 옛 말 틀린게 하나도 없다. 제일 많이 맞은 자식이 효도하고 제일 속 썩인 자식이 부모마음을 제일 잘 안다는 말이. 연락끊겼을때도 넷째오빠가 한 순간 경미한 실수로 학교(?)를 갔을때도 엄마는 한결같이 넷째오빠를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원하셨다. 엄마는 여섯 손가락이 맨날 아팠다. 대지를닮은
고백하자면, 요즘 인생락서에 글을 쓰는 일이 살짝 시큰둥했어요 누군가 내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기쁘고 감사해서 글을 부지런히 올렸는데요 왜 이럴까 왜 뭔가 빠진 것 같이 허전하지? 그런데 그게 유니별님의 부재 때문이었네요 늘 다정하게 댓글을 남겨주시는 유니별님이 요즘 뜸하셨지요 처음엔 바쁜가 보다 데이트하나 보다 참 좋을 때다...했다가, 다음엔 무슨일이 있나? 아버지가 아프시다던데, 많이 아프신가 걱정이 되는 거예요 진심 쪽지라도 보내봐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유니별님이 남긴 댓글이 보였어요 다행이네, 아무 일도 없었구나 그런 안도의 마음이 들더군요 그동안 내 글에 남겨준 유니별님의 댓글도 감사했지만, 다른 이웃분들의 글과 그 아래 달린 또다른 이웃들의 댓글에도 감동을 받고 공감하던 순간이 많았어요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요 서로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채로 살던 나이도 성별도 매일의 일상도 조금씩 다른 채 친구가 된 우리들이요 자신의 책을 보내주고, 산책 길에 만난 귀한 사진을 전송해주고 모르는 걸 차근차근 알려주고 나도 모르는 장원소식을 쪽지로 알려주며 가장 먼저 축하해주며 기쁘다던, 자칭 팬클럽 회장이라며 글쓰기를 격려해주던, 그런 우리들 나는, 만나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뭔가를 함께 해야 친구인줄 알았네요 이를테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거나 혹은 나이가 동갑이거나 같이 여행을 가거나 같이 밥을 먹는, 그런데 여기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공감하는, 우리도 친구 맞네요 오늘 하루, 꽃 한 묶음만큼의 다정함, 보드라움, 온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냥 단순한 글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글이어서이겠죠 그 마음이 먼 곳의 서로에게 닿기 때문이겠죠 인연이 다하여 헤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내내 궁금하고 응원할 거 같아요 지금은 보이지 않는 분들의 글과 마음이 지금도 생각나고 하는 일이 잘되었기를 바라게 됩니다 유니별님, 그리고 다정한 친구들 고맙고 고맙습니다 덕분에 꿈을 계속 꿀 용기를 얻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달맞이꽃을 좋아한다던 유니별님께, 나의 정원에 활짝 핀 달맞이꽃 사진을 남겨요 내 앞에 있었다면 당신의 가슴에 달맞이꽃 한 다발을 와락 안겨주었을텐데요 명랑하고 밝고 다정한 유니별님이 어쩌면 달맞이꽃을 닮았네요 바그다드카페
2008년 5월 28일. 그와 내가 처음 만난 날이다. 스물다섯에 그를 처음 만났고 그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벌써 12년, 우리는 아직 연애 중이다. <1> 소개팅으로 만난 남친은 12년 째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며 자상한 사람이다. 오빠와 나는 내 중학교 동창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엄마 장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 온 소개팅이라 사실 내키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위태로웠고 마음도 많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친구는 이런 때일수록 옆에 누가 있어야 한다며 좋은 남자니까 소개 한번 받아보라고 재촉에 재촉을 했다. 도대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길래 얘가 이렇게까지 하는건가 싶어 속는셈 치고 소개팅 날짜를 잡았다. 첫 만남은 종각 보신각 앞에서였다. 딱 봐도 멀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두리번 거리며 서있길래 저 분이구나 싶었다. 평택에 직장이 있던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나섰다. 초행길에 어리버리하는 그이를 위해 내가 앞장서 걸었다. 퇴근 후 배가 고팠던 나는 닭이 몹시 먹고 싶었고 찜닭 집으로 그를 유인했다.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첫 만남에 소개팅 장소를 찜닭집으로 결정할 수 있는 건 대체 어느 여자가 그럴 수 있었을까. <2> 평소 자주가던 단골 찜닭집에 자리를 잡았다. 마주앉아 차근차근 그의 얼굴을 뜯어보니 꽤 잘생긴 얼굴이다. 분명 나보다 네살이나 많다 그랬는데 연하처럼 느껴질 정도에 동안의 외모. 첫인상은 어쩔 수 없이 외모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법. 이 남자 1차 합격이다! 오예!! 워낙 장사가 잘되는 가게라 사람들이 부쩍거려 시끄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개팅 장소로 찜닭집은 오, 마이 미스테이크!였다. "찜닭 소짜 하나랑..음..밥도 드시겠어요?" "네? 죄송해요. 잘 안들려요." "제가 죄송해요. 여기 너무 시끄럽죠?" "괜찮아요. 손님이 이렇게 많다는 건 맛있다는 증거잖아요. 그리고 저도 찜닭 좋아하거든요." 이 오빠..말하는 것 보소~ 예쁘게 생긴 사람이 말도 예쁘게 한다더니!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밥은 내가 쏘겠다며 마음껏 드시라 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아무래도 첫 소개팅 자리라 내숭모드 장착하고 닭을 새모이처럼 먹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아, 이럴거면 뭐하러 찜닭집에 왔을까 자책했다. "이것도 좀 먹어보세요. 감자가 맛있어요." "아! 네네. 고마워요." "이 집 정말 맛있는데요? 좋은 식당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요. 맛있게 드셔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입이 작으셔서 드시기가 좀 불편하신가 보다. 제가 먹기좋게 살 좀 발라 드릴게요." 그는 고맙게도 나의 내숭을 입이 작아서라고 포장해주었고 기꺼이 살을 발라 내 앞접시에 놓아주는 정성까지 보여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서서히 긴장이 풀렸고 요망한 내숭을 잠재되어 있던 본성이 이겨버렸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 식탐이 훅 하고 튀어나왔다. 결국 공기밥과 내 앞에 몰려있던 닭들을 다 먹어 치우고나서야 젓가락을 내릴 수 있었다. 급 민망해졌지만 내숭없이 잘먹는 여자가 좋다며 보기좋다 말하는 그 사람이 싫지 않았다. 계산대 앞에서 그와 나는 서로 내가 계산 하겠다며 한참을 실갱이 했다. 결국 그가 계산을 하게 되었고 그럼 2차는 내가 쏘겠다며 자연스럽게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3> 술을 한 잔 하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술 한 잔 입에 대지 못하는 알콜무식자였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건 싫지만 가끔 한 두잔 씩 술잔 부딪혀 줄 수 있는 남친이 로망이었는데... 아쉬운 마음 가득이었지만 그래, 술보다는 차가 건강에도 좋으니까. 분위기가 제법 고급스럽고 조용한 찻집에 도착했다. 폭신한 쇼파에 앉아 따듯한 허브티를 한모금 마시니 긴장되던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말하기 보다 들어주는 사람이란 걸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서는 내 쪽에서 수다가 많아져야 겠구나 생각이 들어 쉼 없이 질문했던 것 같다. 다행이 질문을 하면 잘 듣고 대답해주니 그거면 됐지 싶었다. "혹시 노래 뭐 들으세요?" "노래 듣는 거 좋아하시나봐요. 저 지금 MP3에 좋아하는 노래 꽉 채워놨는데 한번 들어 보실래요?" "엇! 그래도 되요? 그럼 혼자 듣는 건 좀 그러니까 같이 들어요." "제가 요즘 넬이라는 가수에 꽂혀 살거든요. 음악성도 뛰어나고 듣고 있으면 괜히 몽환적이 되면서 마음이 촤악 가라앉는 게 좋더라고요." 가방에서 MP3와 이어폰을 꺼낸 그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닿을듯 말듯 머리를 양옆으로 맞대고 서로의 귀에 이어폰을 하나씩 꽂으니 넬의 기억을 걷는시간이 흘러나온다. 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아직도 너의 손길을 느껴 오늘도 난 너의 흔적 안에 살았죠 아직도 너의 모습이 보여 아직도 너의 온기를 느껴 오늘도 난 너의 시간 안에 살았죠 노래가 나오자 그가 흥얼거렸고 나 역시 읊조리듯 따라 불렀다. 그의 목소리와 넬 보컬의 목소리가 화음처럼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여기 혹시 천국인가요. 순간 너무 좋아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아아~~ 시간아 멈춰라.... 야속하게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막차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우리 두 사람은 다음을 기약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4> 최대한 느릿느릿 발을 맞춰 걸었다. 역 안으로 들어왔지만 전철이 들어오는 시간에 급박해져서야 작별인사를 했다. 이렇게까지 첫 만남 후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사람이 있었던가... 왠지 쓸쓸해진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전철 안, 몇 정거장 채 지나지 않아 핸드폰만 들여다보던 나에게 그의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너무 좋았어요. 다음주 주말에 또 보고 싶은데 어떠세요?] 미사어구 전혀 없이 너무나도 심플한 문자. 갑자기 심장이 나대기 시작한다. 워낙 성격이 꽂히면 직진형이었던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문을 보냈다. [좋아요! 다음 주에는 제가 오빠 편한 곳으로 갈게요~ 그 곳이 어디라도!] 아악!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리오그리. 그 날 우리는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도착해서도 긴긴밤 잠 못 든 채 오랜시간 통화했다. 잠드는 게 싫었고 내일이 오는 게 싫었다. 그와 통화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우리 괜찮겠죠?" "저는 아직 어려서 괜찮은데..오빠는 아무래도 좀 힘들겠죠?" "하하하! 아니요! 저도 한 체력합니다! 그럼 우리....그냥 이대로 밤새 통화할까요?" 잠 못들고 밤새 통화라니... 아직도 그 날이 어렴풋이 떠오르면 가슴 한 켠 아스라이 분홍핓 설레임, 소복이 소복이 눈이 되어 쌓인다. [에필로그] 오늘이다. 2020년 5월 28일, 우리가 함께한 지 벌써 12주년. 오빠는 지금 나를 만나러 내가 있는 곳으로 열심히 달려오고 있단다. 먹고 싶은 게 뭐야? 갖고 싶은 게 뭐야? 하고 싶은 게 뭐야? 쉴새없이 묻는 오빠에게 말했다. "다 됐고. 보고싶으니까 빨리와" 유니별84
여기, 짜장면 보통 하나주세요! 평소에 나는 '보통'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 보통은 '곱빼기'를 시켜 먹지만 오늘 쓰고 싶은 얘기가 '보통'에 관한 이야기라서 짜장면 보통을 언급해보았다. 당신들은 '보통'의 어감이 긍정의 느낌과 부정의 느낌 중 어느쪽에 가까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통'은 어찌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중간쯤이라는 생각들을 많이 할 것이다. 성적도 보통, 사는것도 보통, 생긴것도 보통.... 이렇듯 보통이란 단어는 얼핏보면 별거아닌것 같은 어중간한 느낌이 들고는 한다. 하지만, '보통'이란 말을 비슷한 말과 바꿔보면 어떤 느낌일까? 예를들어 중산층, 적당한것, 중립적인것처럼 중간의 느낌으로 긍정에 가까운 단어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전 대통령의 선거 슬로건이 떠올랐다. '나 이 사람 보통사람 믿어주세요.' 이 얼마나 '보통'이란 단어의 활용을 적절하게 사용한것이 아닌가? 물론 시대상황이 있었겠지만 스스로를 보통사람에 가깝게 생각한 많은 이들이 진짜 보통사람이 아니었던 사람을 대통령 자리까지 올려놓았다. 이렇듯 '보통'은 적절한 활용에 따라 큰 힘을 발휘하기도한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요즈음 보통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는 날들이 늘어가고있다. 평범했던 우리의 보통날들이 코로나19로 인해 보통의 날들로의 회귀를 막고있지 않은가? 다시는 코로나19 이전의 삶으로 어쩌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소식이 별거 아니었던 보통의 일상을 기대하게 한다.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일컫는 '보통'은 '여느 보통'이 아닌 '특별한 보통'이 아닐까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비범한 보통도 좋겠지만 평범한 보통도 나쁠건 없겠다. 언젠가 다시 올 보통의 날에 우리는 그 보통의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며... 보통에 보통을 더한다면 곱빼기가 된다. 일상의 보통날들이 더해지면 특별한 날들이 되듯이.. '여기, 짜장면 보통 하나 추가요! ' 까까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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